기자라면 한 번쯤 해봤을 상상이다. 휴가지에서 재난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상상이 현실로 일어났다. 지난달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궁화산 분화로 롬복공항에 3일간 고립됐던 정유경 한겨레 기자·김수영 SBS 기자 부부의 이야기다.
동갑내기 부부인 이들은 지난달 두 아들 시헌(6)·승헌(24개월)군, 정 기자의 친구들과 인도네시아 롬복섬으로 휴가를 떠났다. 발리 아궁화산 분화는 몇 달 전부터 예측됐지만 롬복은 발리와 다른 섬인 데다 화산과는 100㎞나 떨어진 곳이었다.
롬복에서 보낸 2박3일은 평화로웠다. 날씨는 더없이 좋았고 해변은 아름다웠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롬복을 떠나려던 지난달 26일 아궁화산 폭발 소식이 들려왔다. 공항에 도착해보니 이들이 타려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행 비행기가 취소됐다. 바람 때문에 아궁화산 화산재가 롬복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를 타야했다. 아직 취소되지 않은 비행기 표를 구하러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공항은 난리통이었다.
“처음에는 비행기가 곧 뜨겠지 했어요. 심각하진 않았지만 일단 화산 때문에 발이 묶였으니 기자로서 알리고 싶은 상황이 생긴 거죠. 사진 찍고 영상으로 관광객을 인터뷰했어요. 그게 SBS 8뉴스에서 보도됐습니다.”(김수영)
다음날이 됐지만 비행기가 쉽게 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렵게 표를 구해도 취소되는 일이 반복됐다. 두 기자는 회사에 상황을 전했다. 정 기자는 르포기사를 쓰게 됐고, 김 기자는 방송 영상을 찍어 보내야 했다. SBS 스브스뉴스팀은 김 기자가 휴가 갔다 고립된 상황을 카드뉴스로 제작했다.
“기사를 부탁하면서도 미안해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표도 구해야 하고 아이도 봐야 하고 정신이 없긴 했어요. 그래도 어떻게 하나요, 기자인데. 기사는 공항 바닥에 앉아서, 아이가 낮잠 잘 때 틈틈이 휴대폰으로 썼어요. 최근까지 청와대 출입한 게 도움 됐어요. 백브리핑 때 휴대폰으로 워딩 치느라 엄지손이 엄청 빨라졌거든요.(웃음)”(정유경)
외교부를 출입하는 김 기자는 정체성의 혼란도 느꼈다. 외교부가 출입기자들에게 발리 현장 상황을 전하는 문자와 현지 관광객에게 보내는 안내 문자를 동시에 받아봤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다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어요. 서울에 있었다면 출입기자에게 보내는 문자만 받았을 테고, 현장에 취재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당시에도 우리 국민 수백명이 있었던 발리로 들어가서 취재하고 싶었는데 아이들과 일행을 챙겨야 해서 그러지 못했어요. 기자로선 아쉽기도 합니다.”(김수영)
우여곡절 끝에 고립 3일 만인 지난달 28일 자카르타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그마저도 큰아들과 아빠는 오후 4시30분, 둘째와 엄마는 저녁 비행기였다. 남편과 첫째 시헌이가 먼저 떠난 뒤 정 기자는 공항에서 르포기사를 마무리했다. 수속을 밟으러 카운터로 향하는 그때 정 기자가 탈 예정이었던 비행기 편명이 전광판에서 사라졌다.
“왜 수속 안 하느냐니까 이미 이륙했다는 거예요. 공지도 없었는데 비행일정이 당겨졌대요. 자카르타에서 한국 가는 밤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항공사 직원들이 뇨쇼 표가 있을 수도 있다며 위로해줬는데, 한참 뒤에 진짜 표가 생겼어요. 직원들이 박수치며 축하해줄 정도였어요.”(정유경)
인상 깊은 휴가를 보낸 두 기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들 가족에겐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겠지만 기자로서 느낀 점도 많다. 정 기자는 디지털 독자에게 먹히는 기사작법을 고민하게 됐다. 같은 상황을 설명했는데도 독자들은 신문식 르포기사보다 카드뉴스에 더 좋은 반응을 보였다.
김 기자는 소수의 목소리에도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화산 폭발로 고립된 우리 국민이 발리에는 수백명, 롬복에는 20여명 있었어요. 아무래도 발리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는데 막상 당사자가 돼보니 여기도 급한 건 마찬가지였어요. 기사 판단할 때 작은 목소리도 주목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또 하나. 다음 휴가부턴 노트북이랑 방송 리포트용 셔츠도 챙겨갈 겁니다. 하하.”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