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김성광 한겨레신문 기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포 카메라’가 결코 커 보이지 않고, 손에 들린 에스프레소 잔이 한없이 앙증맞아지는 덩치의 서른셋 사진기자는 “어휴, 죄송합니다”라며 잠시 스스로를 추슬렀다. 휴대폰에 적어둔 윤동주 시인의 시 ‘십자가’를 주섬주섬 찾아 “종소리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면서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라는 구절이 마음을 울렸다고 말 할 때였다. 그러니까 ‘이달의 기자상’ 수상소감에 이런 답을 하던 중이었다. “그냥 기사 쓰고 사진 찍고, 이미지 착취·이야기 착취해서 밥벌이를 하는데요. 뭔가 실제로 도움은 못 되는 거 같고 휘파람이나 불고 서성이며 단지 안타까워만 하는 거 아닌가 싶고…”
수상작 ‘불타버린 코리안 드림’에서 그는 한국에서 일하다 안면 화상을 입고 고국으로 돌아간 딜란타 씨 가족을 찾아가 찍고, 썼다. 3년6개월 만의 취재를 위해 김 기자는 추석 연휴기간 사비를 털어 스리랑카 파나두라를 찾았다. 2014년 처음 그들의 존재를 알고 본격 취재하려 했지만 세월호, 메르스 사태, 인천아시아게임 등으로 자꾸만 미뤄졌다. 산재 이주노동자들이 하나 둘 돌아가고 몇 년이 지나며 마음의 짐만 점점 쌓여갔다. 특히 그들을 돌보며, 긴밀히 연락해 온 김성진 포항이주노동자센터장에게 “다시 연락드리기 죄송할 정도”였다고 했다.
“스리랑카 도착해서도 센터장님이 연락을 다 해놔서 또 다른 한국 산재피해자인 두수만타 씨가 절 데리러 왔어요. 그분 부인이 영어를 잘 해서 다 통역해주고, 딜란타 씨 부인 남동생은 팩트체크에 감정 상태까지 설명해주고요. 전 셔터 누르고 취합만 했지 다 같이 쓴 거예요.”
수상을 핑계 삼았지만 사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아프다’고 말해도 아무도 반박하지 못할 세월호 유가족, 중국 농민공 가족, 양팔을 잃은 중국 노동자, 지뢰 피해자, 쌍용차 사태 노동자, 트렌스젠더, 아프가니스탄·시리아·이라크 난민, 캄보디아 결핵 환자 같은 이들이 어떻게 그의 카메라 앞에만 서면 그렇게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지 묻고 싶었다. 그의 사진에서 지뢰피해자는 의족을 벗었고, 무임금 조선소노동자는 속옷 바람으로 숙소를 돌아다닌다. “참 모르겠어요. 가급적 사진기를 먼저 들진 않고요. 여러 번 찾아 뵙고 여러 번 인사드리고요. 자기한테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아세요. 서로 짜증내고 싸우기도 하는데 문득 그렇게 모습을 드러내 주세요. 대단하신 거죠.”
대학 때 학보사 생활을 하며 우주과학도에서 ‘영화’와 ‘언론학’ 전공으로 전과할 때 그는 지금을 상상했을까. 졸업 전 프리랜서 일을 시작한 때부터 2013년 한겨레 입사 후 현재까지 그는 멕시코 후아레즈 마약거래현장, 홍콩 우산혁명, 미얀마 아웅산수치 가택연금해제 등을 취재했다. 해외 유수 상도 여러 개 받았다.
‘어떤 순간 매번 거기 있다’는 건 사람을 지치고 웃자라게 만드는 일이다. 어떤 기자가 되고 싶은지를 물으려던 차 그가 돌연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딜란타 씨 아들이 가라대 도복을 입고 선 모습. “돌아올 때 복을 상징하는 코끼리인형을 받았어요. 애가 방과후 가라대 수업 도복이 없어서 혼자 체육복을 입더라고요. 여비 빼고 100불 정도를 드렸는데 나중에 이렇게 하얀 도복에 노란띠를 맨 사진을 보내줬어요. 이거 제가 사준 거예요.” 답을 알 것 같았다.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