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영화로 만들지 않느냐.”
지난달 27일 개봉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영화 ‘1987’은 송태엽 YTN 기자의 이 한 마디에 시작됐다. 지난 2015년 5월이었다. 김경찬 작가와의 술자리에서 잔뜩 술을 마신 그는 그가 알고 있는 1987년의 모든 것을 김 작가에게 얘기했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사건의 개요, 미스터리한 요소를 강조하며 6월 항쟁 30주년인 2017년 여름에 개봉하면 ‘대박’일 거라고 권유했다. 김 작가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당시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두 달쯤 뒤 송 기자에게 시나리오가 내밀어진 건 그런 연유였다.
사실 송 기자가 김 작가에게 6월 항쟁 관련 영화를 쓰라고 권유한 데에는 “이기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후배들이 해직되고 언론자유지수가 후퇴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 역시 앞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선을 앞둔 지난해 7~8월에 이 영화를 개봉해 조금이라도 길을 트길 바랐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그의 예상보다 더 빨리 무너졌다.
“그렇게 무너질지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어요. 당시 김 작가에겐 ‘이제 흥행이 잘 되긴 어려우니 드라마로 잘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었죠. 우리 세대의 기념비가 되기보다 무한 반복되는 불완전한 인간의 드라마가 돼야 한다고.”
덕분일까. 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화 ‘1987’에 대한 기자·평론가·관객의 반응은 대체로 호평 일색이다. 송 기자는 그 모든 것이 감독과 작가의 공이라며 자신은 ‘영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제가 한 것이라곤 영화에 ‘선데이서울’을 쓰기 위해 서울신문 후배에게 전화 한 통 해준 것, 당시 출입증이나 기자증, 기자 차량이 어땠는지 옛날 선배들에게 물어봐준 게 다입니다. 제가 자랑할 일은 없어요. 오히려 감독과 작가가 훌륭했죠. 저도 당대에 있었던 사람이긴 하지만 1987년을 소설로 재구성하려면 굉장히 어려웠을 겁니다.”
송 기자 역시 1987년의 시·공간에 있었다. 당시는 대학 3학년 과정을 마치고 용산 카투사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출퇴근이 가능했던지라 그는 매일같이 시위에 참가했다. 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씨와의 인연도 있었다. 박종부씨와 야학 선후배 사이였던 그는 박종철 열사가 죽었을 때 박 선배를 위로하기 위해 ‘걸리’가 떨어져나간 ‘막’집에서 술 한 잔 하던 것을 기억했다. “대공 형사가 따라와서 우리 얘기를 듣던 기억이 납니다. 형의 동생은 나에게도 동생이었죠.”
1987년의 경험은 그를 언론계로 이끌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보도를 보며 언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체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 졸업을 앞두고 친 동아일보 시험에선 떨어졌고, 덕분에 평화방송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기쁘고도 우울한 해, 그는 1987년을 그렇게 기억했다. 6·29 민주화선언은 시민들이 쟁취한 첫 승리였지만 현실정치가 맞물리면서 대통령 선거에선 노태우가 당선됐다. 그러나 그는 87년 체제를 실패한 체제라고 정의하는 것엔 거부했다.
“한 술에 배부를 순 없잖아요. 완전한 실패라기보다 성공의 시작으로 봐야죠. 1987년으로부터 30년이 지나오면서 한국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민주주의의 강을 건넜고, 이제 절차적 민주주의는 아무도 뒤집을 수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한국 사회에 시대극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한국전쟁도, 광주도, 아직 틀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1987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겨우 하나의 영화가 나왔을 뿐, 다양한 세대의 눈으로 바라본 많은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