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4일, 미국에서는 래리 나사르라는 의사가 20여년 간 160여 명이 넘는 십대 여성과 성인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최장 175년형을 선고 받았다. 로즈마리 아퀼리나 판사는 래리 나사르의 ‘반성이 담긴 편지’를 휙 던져버리고, 이 편지를 공개하라는 언론의 요청을 거부하며 말한다. “여기엔 피해자에 대한 불필요한 이야기들이 있다. 나는 당신의 언어로 피해자들이 다시 피해자화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여성 대상 범죄, 특히 성범죄 기사를 보기 전이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언제나 부각되는 것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이고, 범죄 사실을 포르노화한 삽화가 붙기 일쑤이다. 피해사실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물론, 범행동기라는 명목으로 가해자의 언어가 헤드라인에 등장한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하여 여성들은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왔지만, 최근의 검찰 내 성추행 사건이 다루어진 경향만 살펴보아도 변화의 기미는 묘연하기만 하다.
기사는 육하원칙에 입각하여 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까지는 객관적 사실의 영역이다. 여기에는 기자의 윤리적 감각이 개입할 틈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를 ‘어떻게’, “왜”를 ‘왜’ 쓰는가의 여부이다. '누가'가 누구를 부각하는지는 의도가 반영되지만 성범죄 피해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기사는 ‘어떻게’가 어떻게 사건과 피해자를 가십으로 소비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피해 사실을 낱낱이 전시하고, 피해자의 불행과 고통을 강조하여 공분을 사려는 욕망은 해롭고 비윤리적이다. 사실 기사가 누구의 입장에서 쓰였는지, 피해자는 이러한 보도에 동의했는지, 기사의 목적은 무엇인지 의심스러워지는 기사들은 이미 너무 많다. ‘어떻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어떻게’ 관음과 호기심이 아닌 알 권리를 충족할지에 대한 성찰과 고민이 없으면 기사는 사건과 피해자를 포르노화하기 쉽다.
“왜”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는 높은 확률로 언론이 가해자에게 마이크를 쥐어준 결과물이다. 성관계 도중 다른 남성의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로 여자친구를 살해한 가해자와, 그 살해 동기를 헤드라인으로 뽑은 기사,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해자만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범행 동기나 정황이 온전한 ‘팩트’일 확률은? 예를 들면 ‘치정 싸움’이라고 보도된 사건에서 연인관계라는 남성 가해자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경우들 말이다.
또한 문제의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 여성의 행실에서 찾는 사회에서, 언론이 가해자의 ‘왜’를 그대로 받아쓴다면? 특정한 옷을 입어서, 무시하는 언행을 해서, 상대 남성이 충분히 받아들일 만큼 점진적이고 온건하게 이별통보를 하지 않아서, 다른 남성과 연락해서, 밤 늦게 돌아다녀서…. 어떤 구실을 붙이든 가해자의 심정은 이해할 만한 것이고, 말할 수 없는 피해자는 원인 제공자이다. 이 ‘왜’는 올바른 ‘왜’가 아니지만 보도되는 순간 유일한 ‘왜’가 된다.
로즈마리 판사는 가해자가 ‘어떻게’ 반성하며 ‘왜’ 그 편지를 썼는지 말할 기회를 차단하였다. 정보를 그대로 옮기거나 사용하는 것은 적확한 ‘어떻게’와 ‘왜’가 아니다. 가해와 피해 같은 권력의 낙차가 존재하면, 보이는 것들은 공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로즈마리 판사의 선택은 무엇을 의미 있는 정보로 판단하고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책임감을 환기시킨다. 기사의 육하원칙을 넘어 기사의 바깥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쓸 지에 대한 기민한 윤리적인 각성이 촉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