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베이징 특파원 박은경 기자와의 통화는 유쾌했다. 몇 번은 ‘으하하하’ 소리만 스피커에서 한참 울리며 말이 끊기기도 했다. 최근 박 기자가 낸 책 ‘판다와 샤오미’ 출간이 연락이유였다. “특파원 끝나고 정리해볼까 했지 중간에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회사에서 얘기가 있어서 좋다고 했는데 사장승인을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출판 계약서도 썼는데 손해 끼칠까봐 부담돼요. 지금도 ‘손익분기점만 넘겼으면!’ 계속 생각한다니까요.(웃음)”
책은 지난 2년 간 실어 온 특파원 칼럼 ‘베이징 리포트’, ‘베이징의 속살’ 등을 묶은 것으로 박 기자 개인에겐 특파원 생활 중간정산격의 의미를 띤다. 그 시간이 마냥 즐거울 순 없었을 것이다. 기자가 기사를 쓴다면 베이징 특파원은 ‘중국에서’ 기사를 쓴다는 것 정도의 차이. 잠시의 환상이 걷히고 나면 이역만리 타국에서의 마감 노동자 일상이 닥친다. 홀로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은 덤이다. 어찌됐든 오전 보고와 온라인 기사, 오후 지면 마감은 매일 이뤄져야 하는 몫이고, 박 기자 성격상 일을 설렁설렁 할 수 있는 타입도 못된다.
책을 보면 이런 흔적은 고스란히 티가 난다. 정치, 외교 분야보다 사회문제와 생활밀착형 이슈에 천착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발로 뛰어 박은 팩트들이 넘쳐난다. 그가 일상에서 얼마나 더듬이를 뻗은 채 살아왔는지가 느껴진다. 발령 후 그는 한 번도 귀국하지 않았다. “쉬었다”고 하는데 듣고 보면 휴가 기간 중국 곳곳에서 취재한 얘기다. “류샤(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인권운동가인 류샤오보의 아내) 집 취재 갔을 때가 기억나요. ‘배달원으로 위장할까’ 별별 생각 끝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집 사진을 몰래 찍고요. 중국용 폰으로 찍어 한국 폰으로도 옮기고 하나는 생리대 주머니에 숨겼어요. 못 들어가게 할 건 알았는데 뭐가 두려워 이렇게 거꾸로 가나 싶더라고요.”
박 기자가 이렇게 뛰어다닌 또 다른 이유 하나는 경향신문 창간 70년 역사에서 그가 첫 번째 여성 특파원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는 “제가 못하면 여자가 못한다고 할까봐 부담이 있었다”고 했다. 현재 베이징 특파원 35명 중 여성 특파원은 4명으로 역대 최대이지만 여전히 소수다. “여기 올 때 여자 선배들이 밥도 사주고 좋은 말도 해주시고, 심지어 가서 자물쇠 바꾸라고 돈도 주셨어요. 후배들은 마스크도 사주고요…회사는 육아휴직도 그렇고 선구적인 분위기인데 결혼을 하면 어려워지는 거 같아요. 육아부담도 크고, 남편이 휴직하고 3년씩 따라가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전 싱글이라 올 수 있었던 거 같은데 우리보다 결혼을 일찍 하는 중국에선 제가 결혼을 안했다고 하면 분위기가 숙연해져요.(웃음)”
97학번인 박 기자는 상하이 여행을 가려고 2001년 중국어를 처음 배우고, 2002년 베이징대에 연수를 갔을 때 자신이 특파원을 하게 되리란 걸 알았을까. 중국과 국내 매체 기자를 거쳐 2007년 경향신문에 입사할 때는 예상했을까. 그는 책날개에 “입사 후 중국어를 잘한다고 소문났는데, 변변치 않은 실력이 들킬까봐 몰래 전화중국어 과외를 했다. 덕분에 베이징 특파원이 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고 적었다. 이제 막 반환점을 돈 그에게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특파원으로 기억되길 바라는지 물었다. “우리나라 촛불시위를 CCTV로 중국에서 보고, 탄핵도 봤는데 여긴 시진핑 장기집권 한다고 헌법을 바꿔요. 부모님 시대를 사는 거 같고 기분이 묘해요…‘안 되는 상황인데 열심히 살았어’ 그런 얘길 들으면 최고 칭찬 아닐까요.”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