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 변했다

[글로벌 리포트 | 베트남]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국빈 방문 중이던 지난 23일 베트남의 온라인 뉴스에서는 ‘한국 대통령’이 화제였다. 전날 베트남에 도착한 문 대통령이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과 23세 이하(U-23) 대표 선수들을 만나 격려한 소식을 전하는 것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타전된, 전직 대통령 구속 소식을 전하는 기사였다. 궁금해 하던 기사는 그보다 한참 아래에 랭크돼 있었다.


문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동안 일어났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등 대형 이슈에 밀려 한국 언론이 크게 주목하지 못한 것이 있다. 베트남 과거사에 대한 한국 대통령의 유감 표명과 그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반응, 유감을 표명한 한국 대통령에 대한 베트남 언론의 보도 등 베트남 측의 반응이다. 베트남 측 반응과 보도는 모두 처음 있는 일이다.


23일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양국 간 불행한 역사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쩐 다이 꽝 주석은 “베트남전 과거사에 대한 한국정부의 진심을 높이 평가한다”고 화답했다. 과거사 언급이 금기시되고 있는 분위기를 감안하면 베트남의 이 같은 태도는 적지 않은 변화다. 오는 4월 말이면 종전(통일) 43주년이 되는 베트남이지만, 무력 통일로 인한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


베트남 과거사에 대한 한국 대통령의 유감표명은 앞서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답이 돌아온 적은 없었다. 모두 묵묵부답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8월 방한한 쩐 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을 때 득르엉 주석이 ‘어쩔 줄 몰라 했다’는 것은 외교가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베트남은 한국 정부의 사과를 원하지 않았다. 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10월 호찌민 묘소를 참배하면서 “우리 국민은 마음의 빚이 있다”는 말로 유감을 표명하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는 게 현장을 지키던 이들의 이야기다. 작년 11월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당시 영상축전을 통해서도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지만 베트남 측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한국 대통령의 사과를 한국 언론들은 보도했고, 한국인들만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베트남 언론도 달랐다. 정상회담 몇 시간 뒤 베트남 현지 언론 ‘꽁안’과 ‘바오머이’가 “(문 대통령이) 베트남전과 관련하여 사과(xin loi)를 했다”고 보도했고, 이어 국가 주석실에서도 몇 시간 뒤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국빈방문 공식 행사 사진과 함께 문 대통령의 사과 소식을 공식 공개했다. 베트남 과거사에 대한 한국 대통령의 유감 표명 소식을 전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사에 대한 유감 표명에 그간 무시로 일관하던 베트남이 이렇게 돌아선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우선 새로운 관계 구축 의지 표현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국 대통령을 새해 첫 손님으로 맞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베트남에서는 음력 설 이후 연인을 첫 손님으로 집에 초대하는 일은 청혼으로 통용될 만큼 첫 손님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수교 26주년이 되는 해에, 새로운 25년을 시작하는 첫해 첫 손님으로 모신 문 대통령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대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감 표출이기도 하다. 베트남 사회에 과거 이야기가 올라오더라도 이제는 크게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 그들 내부가 성장했다는 뜻이다. 아무리 중요한 손님이라 하더라도, 그런 내부의 여유가 아니었더라면 “불행한 역사에 유감을 표한다”는 문 대통령의 이야기가 보도되지도, “한국정부의 진심을 높이 평가한다”는 주석의 답도 나올 수 없었다.


지난해 수교 25주년을 기념해 양국이 다양한 행사를 벌이는 동안 베트남 측에서는 적지 않은 우려가 나왔다. 지금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극적인 관계 진전을 이뤘는데, 앞으로도 이런 관계를 과연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주였다. 베트남의 이번 ‘변신’은 양국 관계에 있어 잠재적 복병이 될 수 있는 문제를 수면 위로 한번 드러내 보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국가가 모든 국민의 고민을 한 단어로 압축해서 표현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유감을 여러 차례 표했고, 뒤늦게 화답한 베트남의 짧은 말 한마디지만 거기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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