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이 끝날 무렵 폴더형 휴대전화를 처음 갖게 됐다. 제일 먼저 엄마 번호를 저장했다. 송명희씨. ‘엄마’라는 호칭 대신 ‘송명희씨’라는 이름을 꾹꾹 눌러 찍었다. 나는 늘 엄마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른 속내도 있었다. 엄마가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송명희씨인 것처럼 나 역시 ‘누구의 딸’이 아니라 장일호씨라는 걸 선언하고 싶었다. 자라는 동안 수많은 날을 엄마와 반목하면서 알게 됐다. 엄마를 많이 사랑하지만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는 걸.
여기, 그런 소녀가 또 한 명 있다. 영화 <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 맥퍼슨(시얼샤 로넌 분)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 대신 자기 스스로 지은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불리길 원한다. 달콤한 연애는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한다는 걸 굳이 경험으로 배워야 아는 나이. 열일곱 소녀의 일상은 발로 차버리고 싶은 ‘흑역사’로 가득하다. 갑갑한 시골 동네와 가족 품을 벗어나 아이비리그에 다니는 뉴요커가 되고 싶지만 성적마저 뜻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빠와 돈에 쪼들리는 엄마의 사정이라는 건 알아도 모르는 척 하고 싶고 중요해도 잊어버리고 싶은 일이 된다. 엄마에게 노트와 펜을 들이밀고 거칠게 흔들며 “나한테 들어간 돈 여기 다 적어! 내가 나중에 성공해서 갚아주면 되잖아!”라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면서는 결국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저기 왜 내가 있지…’ 싶은 머쓱한 마음에 터지고 마는 웃음. 그렇게 영화의 많은 순간 열일곱의 나와 그런 나를 견뎠을 내 엄마의 얼굴이 자꾸만 포개졌다.
<레이디 버드>는 <프랜시스 하>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배우 그레타 거윅의 감독 데뷔작이다. 세상 많은 이야기가 ‘내 이야기’에서 출발하듯, <레이디 버드> 역시 그레타 거윅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담겨있다. 그레타 거윅은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 위에서 한 리포터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10대의 자신에게 한 마디 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 그 자리에서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정답을 말한다. “엄마에게 좀 더 친절하렴.”
<레이디 버드>를 보고 나오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영화 속 딸처럼 “고마워요”라는 흔한 말을 엄마에게 꼭 하고 싶었다. 네 글자 안에 담은 마음은 이런 것들. 엄마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원했던 철부지라서 미안하다고, 결국 엄마가 바라는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그런 나를 계속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세상의 많은 딸들에게 <레이디 버드>는 그렇게 ‘러브스토리’가 된다. 이 특별한 로맨스가 주요 영화제에 단골 노미네이트되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