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8일 여의도 KBS 본관 3층에 경찰이 난입한 사건은 KBS가 정권의 방송으로 전락하는 서막이었다. 당시 정연주 사장을 해임하기 위해 열린 KBS 이사회는 신변보호를 이유로 사복경찰을 불러들였다. 경찰은 정 사장 해임에 반대하는 구성원들을 때리고 밀어뜨리며 내몰았고, 그 사이 KBS 이사회는 정 사장에 대한 해임 제청안을 가결했다. 검찰과 감사원, 국세청 등 주요 국가기관이 총동원된 정 사장 몰아내기는 MB정부의 방송장악 시나리오대로 실행됐다.
그 후 지난 10년, KBS는 ‘국민의 방송’과 철저히 멀어졌다. 사장의 연탄 나르기 행사가 메인뉴스에 나오고, 청와대 홍보수석이 사장에 전화해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고, 보도 수뇌부들은 “최순실이 대통령 측근이 맞나”라며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 요구를 묵살하고, 내부 문제를 비판한 구성원들은 줄줄이 징계를 받았다. 그렇게 KBS는 한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에서 그런저런 방송으로 추락했다. 지난해 방송통신위원회의 지상파 재허가 심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조건부 재허가를 받은 것은 KBS의 추락한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권의 나팔수라는 오욕을 끝내려고 KBS 구성원들은 지난해 9월 파업에 돌입했다. 창사 이래 최장인 142일 파업이었다. 파업 와중인 지난해 12월 광화문에서 547명이 240시간 동안 릴레이 발언을 했다. 체감온도가 영하 20도에 달하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구성원들은 참회록을 쓰고 KBS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양승동 사장 체제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흑역사를 청산하겠다는 KBS 구성원의 열의와 국민의 방송으로 돌아오라는 시민의 명령이 녹아 있는 것이다.
양 사장은 지난 9일 취임식에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양 사장은 “KBS의 주권은 시민과 시청자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시민과 시청자로부터 나온다”고 밝혔다. ‘완전히 새로운 KBS를 만들겠다’며 취재·제작의 자율성 보장, 인적 쇄신을 약속했다. 그 시작으로 구성원의 신뢰를 받는 개혁적 인물들을 대거 발탁했다. 약속이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가죽을 벗기는 심정으로 KBS를 혁신해야 한다.
수신료를 재원으로 하는 KBS의 역할은 권력과 자본을 비판하고 진실을 추구하며 시민에게 복무하는 것이다. 하지만 KBS에 저널리즘은 없었다. KBS는 지난 세월 정권과 자본의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속삭임에 공공연하게 동조하거나 내응했다. 그렇다고 지난 10년의 흑역사를 정권의 방송장악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정권이 임명한 사장에 기대어 저널리즘을 팔고, 공정방송 싸움에 참여했던 동료를 편 가르고 배제했던 이들이 있다. KBS의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양 사장 취임으로 KBS는 재건의 첫 발을 내딛었다. 경영진은 공정방송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 개혁을 서두르고, 구성원들은 공영방송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KBS의 지난해 매출액은 1조4326억원, 종사자는 4602명이다. 이 정도 규모의 언론사가 못할 게 무엇이 있나. 국민들은 수신료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는 KBS를 만나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