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채소연의 “농구, 좋아하세요?” 한 마디에 농구를 시작한다. 전설의 시작이다. 그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9년 전의 나는 “여성영화,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서 여성영화제와 처음 만났다.
강백호는 무작정 농구를 좋아한다고 외쳤다가 농구의 매력에 빠진다. 나는 부족한 ‘밑천’을 들킬까봐 의무적으로 여성영화제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그동안 우리가 눈만 돌리면 보이던 영화들, 상영관을 독식하거나 모 영화제의 수상작, 거장의 역작이라고 찬사를 받던 작품들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 그 안에서 여자 캐릭터들은 또 얼마나 납작했는지.
오죽하면 ‘냉장고 속의 여자(Women in refrigerator)’라는 용어까지 있다. 남성 캐릭터의 각성과 동기를 위해 살해당하거나, 강간 당하거나, 부상 당하는 여성 캐릭터 혹은 이러한 여성의 목록을 모은 웹사이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만화팬이 만든 용어이지만 이러한 클리셰는 대부분의 대중 문화 콘텐츠에서 나타난다.
처음에는 여성영화와 내외(?)했다. 여성들만 나오거나 퀴어 여성이 주인공인 콘텐츠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영화 자체를 이해하는데도 꽤 애를 먹었다. 중심에서 비껴난 서사와 주제는 종종 난해하다고 느껴졌다. 여자를 때리거나 죽이는 남자 캐릭터의 내면은 온 세상이 달려들어 친절하게 해석하고 의미부여 해주지만, 여자 캐릭터의 욕망과 선택과 내면에 대한 해석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의미를 발굴하고 취향이 형성되는 데에는 꾸준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 여성영화를 보도록 독려하는 환경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 지리적으로 가까운 입지 등이 아니었다면 금방 포기했을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지만 이것은 개인의 운에 기대서는 안되는 문제이다.
다양한 관람의 기회를 제공하는 인프라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만 몰려 있다. 여성 무당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만신>을 엄마에게 추천했지만 지방에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거제여상 스포츠댄스 동아리 학생들의 반짝거리면서도 묵직한 청춘을 그린 영화 <땐뽀걸즈>를, 고등학교 1학년인 여동생이 영화관에서 볼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접근성 문제를 해소하는 인프라의 확충은 물론, 제작 단계에서의 지원, 콘텐츠를 채택·제공하는 과정에서의 다양성 존중, 새로운 관점의 콘텐츠 해석 교육 등이 필요하다.
고정적인 수요는 양질의 여성 서사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여성 영화를 소비하고 폄하되었던 가치를 재평가하려고 한다. 오는 5월 31일부터 6월 7일까지 메가박스 신촌 일대에서 ‘제20회 서울 국제여성영화제’가 개최된다. 여성영화가 1년 중 어느 한 주간, 서울의 특정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틀면 나오는 세상을 꿈꾸며 올해의 여성 영화제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