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익이 하는 말

[스페셜리스트 | 문화] 박돈규 조선일보 주말뉴스부 차장

박돈규 조선일보 주말뉴스부 차장. 가수 장사익은 2016년 초 성대에서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8개월 동안 발성 연습을 하며 노래로 가는 길을 되찾아야 했다. 지난봄에 만난 그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보낸 세월”이라고 했다.


“수술하고 쉴 때는 다리 부러진 마라톤 선수처럼 앞이 안 보였어요. 영영 노래를 못 하게 되면 운전을 해야 하나 경비를 서야 하나. 막막했어요. 노래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알았지요.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가 이거구나. 노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열여섯 번째 직업으로 가수가 된 이 남자, 웃음이 참 많다. 자연스럽게 얼굴에 주름이 패어 있었다. 손녀가 “할아버지 얼굴에 왜 그렇게 줄이 많아?” 물었을 때 이렇게 대꾸했단다. “저기 나무 있잖어. 봄여름가을겨울 지나면 나무도 몸 안에 줄이 하나씩 생긴다. 너도 저 나무처럼 몸속 어딘가에 줄이 있을 겨.”


주름살은 인생의 계급장이라고 그는 말한다. 2년 전 수술도 몸에 나이테처럼 흔적을 남겼다. “목소리가 맑아졌지만 전처럼 파워풀하지는 않아요. 윗소리가 자신 있게 올라가지는 않고 가끔 뒤집어질 때도 있지요”라며 소탈하게 웃었다.


그는 상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3년간 가수학원에 다녔다. 현실에 치여 꿈을 접었다. 이리저리 직업을 옮겨 다녔다. 딸기 장수부터 카센터 직원까지 무려 열다섯 가지다. 1994년 마흔여섯 살이 되어서야 긴 유랑을 끝냈다. 장사익은 여느 가수들과는 정반대로 인생을 배우고 나서 가수가 된 셈이다.


“노래란 인생을 얘기하는 거예요. 젊은 가수들은 경험이라곤 사랑과 이별밖에 없잖아요. 저는 인생 굽이굽이를 돌았지요. 말이 그렇지 열다섯 번이나 잘리고. 하하하. 쓰러져도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알게 모르게 비축하고 나서 가수가 된 거예요.”


장사익이 방황하던 시절 마지막으로 손에 쥔 게 태평소였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국악기를 붙잡고 3년을 배워 프로가 돼보자 마음먹었단다. 한강변에서도 불고 이불 속에서도 불었다. 최선을 다하니 뒤에 숨어 있던 노래의 길이 열렸다. 공연하면 1부는 울리고 2부는 웃긴다는 그는 “세상 사람 열에 아홉은 힘든 하루를 보낼 텐데 진정한 위로는 같이 울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달 전주에서 버스기사 허혁씨를 만났다. 가끔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모아 펴낸 에세이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는 현재 베스트셀러다. 작가가 된 그는 “모든 게 기적”이라며 “이 책은 선물이 아니라 인간이 될 마지막 기회라는 ‘선불’ 같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트럭 운전수였다가 영화 ‘터미네이터’로 최고의 흥행 감독이 된 제임스 카메론도 떠올랐다.


장사익이 부르는 ‘이게 아닌데’를 다시 들었다. 길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길의 무덤에 다다랐다고 여겼는데, 이제 시작일 수도 있구나. 입국장에 선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나직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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