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이어지며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향해 진일보하고 있다. 여기에 맞서 뭔가 일이 틀어지기를 갈망하는 저항의 몸짓들이 우리나라에도 미국에도 등장한다. 우리 일부 언론도 분명 가담하고 있다. 정치지도자나 공공 언론이 평화를 지향하지 않는 건 어떤 연유일까?
첫째는 ‘수구우익’이란 가치로 설명할 수 있다. 기득권 체제를 양호하게 유지하고 싶다면 전쟁종식은 갈급하지 않다. 둘째로는 ‘상황의 유불리’다. 자기편이 확실히 이기고 있다면 승리와 이득이 눈앞인데 싸움을 멈출 이유가 없다. 셋째는 상대가 ‘협상 테이블로 기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종결방식이다. 무조건 항복에 가까운 협상테이블이 더 큰 이득을 가져오니까.
‘저널리즘’이 평화와 공공선 대신 분쟁을 목표로 하는 걸 편의상 ‘호전적 저널리즘’이라고 해두자. ‘호전적 저널리즘’은 상대를 향한 적대감과 혐오를 부추긴다. 또 작은 분쟁에 대해 더 강력한 응징과 보복을 요구하며 분쟁의 판을 키우려한다. 그래서 민주적이기보다는 권위주의적인 지배체제를 응원하고 결과로 빈부격차와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그러다 평화협상이 진행되면 입장 차이를 과대포장해 결렬 쪽으로 몰고 간다. 평화협상을 저지하려는 정략적 프로파간다를 일축하기보다는 오히려 발굴해 내고 확성기 노릇을 할 것이다.
전쟁과 분쟁은 폭발적이다. 반면 평화는 길고 지루한 과정이다. 저널리즘은 오랫동안 폭발적 사건에 집중하도록 훈련돼 왔다. 흉험한 폭력이나 갈등일수록 주목한다. 누구나 배워 온 뉴스의 구성요건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건 보도기사 작성의 정석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그 원칙이 먹히던 시대는 끝났다. 사람이 개를 무는 건 병리적으로 따질 문제지 저널리즘의 영역이 아니다. 지금은 개가 사람을 물면 원인규명에 처벌·보상까지 이슈가 된다.
그 흉흉함에의 천착이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고 본령일까? 그 예가 1990년대 ‘Bugger Bosnia’ 신드롬에 대한 반성이다. 보스니아에서 끔찍한 전쟁범죄와 난민 소식이 날마다 쏟아지다보니 언제부턴가 웬만한 전쟁범죄는 뉴스가 되지 않았다. 학살도 집단강간도 보스니아 소식이면 짜증거리로 내쳐졌다. 그런 예는 즐비하다. 어린 아기의 익사한 사진 한 장으로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했던 난민 보도가 사라지고 있다. 지금도 굶주리며 떠도는 수십 수백만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세월호 피로감’, ‘촛불 피로감’을 들먹인 우리도 그 부류에 속한다. 이런 핫이슈도 시간이 지나면서 피곤하다고 버려지는데 분야별로 길게 이어질 평화회담과 실무협상은 두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당연해서는 안 되나 당연히 벌어질 일이다. 그리고 ‘호전적 저널리즘’은 이를 파고들며 평화로 가는 길을 흔들 것이다. 회담이 난항에 빠지거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면 그 이슈를 과대포장해 비관론을 펼 것이고 누군가는 베껴 쓸 것이다. 때가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가 냉전의 일부였음을 알아차리고 경계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구시대의 유물로 적폐로 한반도 평화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