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에는 꼭 온 얼굴에 짜장면을 묻혀가면서 먹는 젊고 예쁜 여성배우들이 등장한다. 잭슨 폴록이 한국 여자로 태어났다면 자신의 얼굴에 춘장 소스를 뿌리는 것으로 예술가적 끼를 발산했을 거라는 데 손목을 건다. 왜 성인 여성이 그런 연기를 할까? 예쁜 여자가 그렇게 먹으면 자신의 미모를 의식하지 않는 ‘털털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예뻐도 예쁜 척하지 않는 것’이다. 예쁘지 않은 캐릭터가 얼굴에 음식을 바르면 그것은 그냥 ‘추한’ 식탐을 의미하고, 배우의 체형이나 비만인을 희화화하려는 목적뿐이다. 예쁘지만 예쁜 척하면 ‘불여우’가 되고, 안 예쁜데 예쁜 척하면 ‘진상’이 된다.
예쁘지 않으면 여자도 아니고, 예쁜 것이 곧 착하다고 찬양하는 세상에서 왜 예쁜 ‘척’은 안될까? 이를 확장하면 ‘여자짓’이고, 여자짓이라는 워딩은 여성성 자체에 대한 혐오와 멸시를 드러낸다. 이는 곧 여성스러우면서 동시에 여성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분열이다. 한국에서 젊은 여성이 갈고 닦아야 하는, 혹은 갈고 닦도록 끝없이 강요 받는 교묘한 ‘덕목’ 말이다.
대학 수업 때 들었던 이야기를 자주 떠올린다. 1980년대 농활에서, 막걸리에 온갖 오물을 타서 술잔을 돌리는 사발식이 벌어졌다고 한다. 대학생이었던 교수님은 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동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를 보며 갈등했다. 한 여자 선배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훌훌 마시고 환호를 받았다. 다른 여자 선배는 “얘들아, 가자”라고 외친 후 후배들을 이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설정하고 이를 거부하면 ‘나약함/진정성이 떨어지는/열등한’ 즉 ‘여성성’으로 낙인 찍는 상황에서, 두 여성은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나는 여성에 대한 이중 잣대에 분노하는 한편, 두 여성에게 애틋함을 느꼈다. 한 명은 개인의 강인한 비위를 과시함으로써 여성은 나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하려고 했을 것이다. 누구는 그 여성을 보고 자신의 편견을 깨고, 누구는 그 여성이 폭력적인 관행에 복무한다고 생각했겠지. 또 다른 한 명은 불필요한 행위를 거부하고, 더 어린 여자 후배들까지 보호했다. 그러나 “여자는 저래서 안돼”라는 편견을 강화했다는 비난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
다른 선택들은 각기 다른 맥락에서 유의미하다. 여성은 ‘여성스럽게’ 굴어도, ‘여성스럽지 않게’ 굴어도 비난 받는다. 여성성은 언제나 열등함의 지표로 은쟁반의 하이얀 모시수건처럼 준비되어 있다. 오물을 섞은 술잔이 도는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여성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났을 전쟁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 전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벌어지는 중이니까. 나의 어제와, 당신의 오늘과, 우리의 내일에. 여성에게 다를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 다름을 비하하는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여성스러운 가면을 써가며, 어떨 때는 그것을 과감히 벗어던져 충격을 가하며, 타인이 여자답거나/여자답지 않음을 지적받는 순간을 함께 저지하며 이 거대한 벽을 두드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