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칸 스탠드오프

[글로벌 리포트 | 미국] 국기연 세계일보 워싱턴 특파원

국기연 세계일보 워싱턴 특파원. 멕시칸 스탠드오프(Mexican Standoff)라는 말이 있다.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서로 총을 겨누고 있고, 이때 누군가 먼저 총을 쏘았다가는 자신이 총에 맞아 죽을 수 있어 누구도 총을 쏘지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누군가 이 공포의 균형을 견디지 못하고, 겁에 질려 총을 쏘면 죽고 죽이는 참극이 벌어진다. 서부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정부에서 일하는 백악관 직원들은 모두 멕시칸 스탠드오프 상황에 있다고 한다. 충성 경쟁을 즐기는 트럼프 대통령 밑에서 일하다 보면 누가 자신에게 총을 쏠지 몰라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참모들이 사용하는 총은 정보이다. 트럼프 대통령 측근들이 라이벌을 제압하려고, 상대방에게 불리한 정보를 언론에 고의로 흘려준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 역대 최고의 정보 유출 정부라고 CNN 등 미국 언론이 평가했다.


흥미로운 현상은 그렇게 유출되는 정보가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언론사에 집중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망해 가는’ 이라는 수식어를 꼭 붙이는 뉴욕 타임스(NYT), ‘가짜 뉴스’라고 부르는 CNN, 워싱턴 포스트(WP)는 트럼프 정부에서 끝없이 특종을 쏟아내고 있다. 그 이유는 정보 유출자들이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기사를 크게 다뤄줄 영향력 있는 매체를 찾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5일 트위터를 통해 “정보 유출자는 반역자이고, 겁쟁이”라고 질타하고, 정보 유출자 색출 특명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나 이때에도 “가짜 뉴스가 유출된 정보를 과장해 정부 이미지에 먹칠하려 든다”고 말해 정보 유출 단속보다는 언론 보도 행태에 더 격분하는 태도를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모두 언론에 유출되다 보니 트럼프 정부는 역대 최고로 투명한 정부라는 조롱을 받는다.


백악관은 정보 유출을 막으려고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우선 백악관에 근무하는 직원은 사무실에 자신의 휴대폰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휴대폰은 자신의 자동차에 두거나 백악관의 개인 사물함에 넣어둬야 한다. 이 때문에 백악관 직원들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 등을 확인하려고 온종일 사물함을 들락거리고 있다. 또 정장 차림의 보안 요원이 전자 장비 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온종일 백악관 사무실을 훑고 다니고 있다고 CNN이 최근 보도했다. 백악관이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은 전자 장비를 직원들이 반입해서 사용하는지 조사하려는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이 주재하는 회의 참석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다수의 비서관실이 참여하는 ‘일일 브리핑’은 무기한 폐지했다. 대변인실 등 각 실·국은 별도의 소규모 회의를 개최하도록 했다. 회의 규모를 줄이면 관련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소수에 그치기 때문에 정보가 새나갈 가능성이 줄어들고, 정보 유출 사태가 발생하면 유출자를 찾아내기도 쉬워지게 마련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그러나 이런 대책이 효과를 거의 내지 못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백악관이 실·국 단위로 정보 유통을 차단하면 대통령의 정책이나 메시지에 혼선이 빚어지고, 백악관의 전체적인 팀워크가 깨지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굳어졌다는 게 미국 언론의 평가이다.


CNN은 ‘문제는 대통령이야. 바보야!’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리얼리티 TV 쇼를 하듯 언론을 이용해 정치하고 있는 게 문제라는 지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침에 눈을 뜨면 텔레비전을 켜고, 폭스 뉴스 등을 시청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참모들이 이런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폭스 뉴스를 대상으로 언론 플레이를 하거나 유력 매체에 정보를 흘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 불가’의 지도자이다. 그는 전통적인 국정 운영 시스템에 따르지 않고, 백악관과 내각에 포진한 참모들의 조언을 잘 듣지도 않는다. 현 미국 정부의 무더기 정보 유출 사태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방향을 예측하는 데 그나마 도움이 된다. 백악관의 혼란상이 어떻든 최소한 백악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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