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어가 된 도광양회

[글로벌 리포트 | 중국]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덩샤오핑(鄧小平)은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대외전략의 기본으로 삼았다. 한실 부흥의 웅대한 포부를 감추고 천둥 번개에 떠는 필부(匹夫)연 하면서 조조에 몸을 의탁했던 유비처럼 자기자신을 낮추고 묵묵히 실력을 기르면 언젠가 때가 올 것이라 그는 믿었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생전에는 물론 적어도 100년 동안은 이 전략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내건지 올해로 만 40년이 된다. 중국은 어느 새 100년 갈 것이라던 도광양회 전략을 거둬들였다.


지난달 22일과 23일에 베이징에서 열렸던 중국 공산당의 중앙외사공작회의가 단적인 사례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집권 2기에 추진해 나갈 대외관계의 목표와 기본 이념을 소상히 밝혔다.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이를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외교사상’ 혹은 ‘시진핑 외교사상’이라 이름 붙였다. 이를 잘 들여다보면, 서구 중심의 기존 국제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중앙외사공작회의는 당·정·군과 각 지방의 대외 업무 및 홍콩·대만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향후 대외 전략의 방향과 전략을 공유하는 회의다. 중국의 최고지도부를 구성하는 시진핑 주석 이하 당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전원과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이 이 회의에 총출동했다. 그 밖에 전 세계에 파견된 대사급 외교관은 물론이고 공산당 선전부와 대외연락부, 군 연합참모부, 정부 각 부처 간부들이 외사공작회의에 출석했다. 이 회의가 열린 것은 후진타오(胡錦濤)집권기인 2006년과 시진핑 집권 1기인 2014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경제공작회의가 매년 연말 한 차례씩 열리는 것과 비교하면 이번 외사공작회의가 갖는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눈여겨 본 것은 시진핑 주석이 이번 회의에서 밝힌 역사관과 정세관이다. 그는 현 시기를 국제질서가 급변하는 전환기이자 과도기로 보고 있다. 그 과도기 속에서 중국은 커다란 기회를 맞고 있다는 인식도 내보였다. 인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시 주석은 “중국은 근대 이후 가장 양호한 발전기에 있고 세계는 지난 백년간 겪지 않은 변혁기에 있다. 이 두 변화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중국에 유리한 국제환경이 갖춰졌다”고 말했다. 근대 이후 백수십년간의 고난을 뒤로 하고 역사의 물줄기가 중국의 편으로 흐르고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펼친 것이다. 그는 “세계질서의 과도기를 맞아 국제정세 전환법칙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역사의 교차기에 우리나라를 둘러싼 외부환경의 특징들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이 시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면 다시 한 번 중국이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융성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진핑이 내건 ‘중국의 꿈’이다.


이 같은 정세인식을 바탕으로 시 주석은 “글로벌 거버넌스 체계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과거에는 없던 발언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꿔나갈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보도되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의 국제질서를 개혁의 대상으로 보고 있으며 그 개혁을 중국이 주도하려 한다는 점이다. 시 주석의 발언 중에는 그 방략의 일단을 드러낸 부분도 있다. 그는 ‘일대일로(新 실크로드 경제권 구축)’ 전략을 설명한 뒤 “발전도상국은 우리나라의 국제업무에서 천연(天然)동맹군들로 이들과 단결·협력의 대문장(大文章)을 써 나가자”고 강조했다. 모든 형태의 동맹에 반대하는 것을 대외 전략의 대원칙으로 삼고 있는 중국 지도자가 비유적 표현이긴 하지만 ‘동맹군’이란 단어를 사용한 건 이례적인 일이다. 전통적으로 중시해 온 제3세계나 발전도상국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우군(友軍) 세력 확보에 주력할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후진타오 후반기나 시진핑 집권 초기 ‘유소작위(有所作爲)’가 중국 대외전략의 기본방침인 것처럼 회자된 적이 있었다. 무조건 몸을 낮출 게 아니라 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한다는 의미였다. 그 후 점점 목소리가 커지더니 이제는 글로벌 거버넌스 개혁의 주도자를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는 사이 도광양회는 중국의 ‘외사공작 용어사전’에서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