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대법원

[스페셜리스트 | 법조] 백인성 머니투데이 기자

백인성 머니투데이 기자 “변호사 7명을 대상으로 한 ‘블랙리스트’가 나왔습니다.” 13일 저녁 진보 성향 변호사단체인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서울고등검찰청 기자실 브리핑대에 섰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고위 법관들의 인사적체 해소와 이들에 대한 대법원장 영향력 강화를 위해 ‘상고법원’ 설립을 총력으로 추진하고 있었고, 이에 반대하는 변협과 민변 등에 대한 대응문건을 작성했다. 이날 변호사들은 대법원 법원행정처 문건들에 실린 방안이 실제 실행됐는지 피해자 입장에서 조사를 받았다.

 

검찰에서 민변 변호사들에게 제시한 문건은 지난 2016년 10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000086야당분석.hwp’ 파일이었다. 변호사들은 “문서 상단엔 ‘개헌특위’ 단어가 기재됐으며 당시 민변 집행부 7명의 이름과 사법연수원 기수, 소속 사무실 명칭이 등장하고, 문건에서 작성자는 이들을 ‘블랙리스트’로 지목하며 굵게 밑줄을 긋고 “안 되는 이유를 퍼뜨려야 함”이라고 적었다”고 말했다. 판사들이 스스로 사법부를 하나의 이익단체로 보고, 추진하는 정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변호사 개개인에 대한 방해와 불이익을 검토했다는 의혹이 문건으로 확인된 것이다.

 

변호사 블랙리스트는 대법원이 현재 받고 있는 의혹의 일각에 불과하다. 상고법원 설립을 위해 재판을 박근혜 정권과 거래했다는 의혹, 상고법원에 비판적인 법원 내 판사들도 사찰했다는 의혹도 있다. 심지어 후자는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달 15일 “사법행정의 영역에서 필요한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다(김명수 대법원장)”던 장담과 달리 검찰의 거듭된 자료 요구에도 한 달이 지나도록 자체 조사단의 조사 대상이 됐던 자료 외엔 내지 않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지난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법위원장 출신 이재화 변호사가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되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대법원의 침묵’을 두고 법조계에선 대법원이 스스로  논란을 뿌리뽑을 기회를 실기하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최근 변호사 커뮤니티엔 △대법원이 상고법원 추진을 위해 처음부터 정부의 입맛에 맞게 결론이 나도록 힘을 쓴 것일지 △대법원 판결은 법리대로 난 것이고 박근혜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결들로 정부를 설득하려다 실패한 것일지 의견을 구하는 글이 올라왔다.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은 이랬다. ‘실체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으나, 이미 논란만으로 전자와 버금가는 사법불신을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사법농단 외 다른 의혹들이 포착될 가능성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닌지 불필요한 의심이 불거지고 있다는 것이다.

 

‘재판이 누군가에게 유리하게 거래됐다는 의심’을 뿌리뽑지 않고선 사법부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미 국민들은 지난 70년간 단 한 번도 견제받지 않았던 사법권력이 혹시 뿌리부터 썩은 건 아니었는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심을 풀지 않고 넘어간다면 향후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판결에서 진 쪽의 승복을 기대하기란 난망하다. 사법부가 인적 청산과 함께 의혹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사기관뿐 아니라 국민에게도 공개하고, 책임 있게 나서 국민에게 해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그래서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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