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사법부를 삼켰다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브라질은 나름 강력한 삼권분립의 전통을 갖고 있다. 특히 법원과 검찰은 상당한 독립적 권한을 행사한다. 권력형 부패수사가 역사상 최대 규모로 최장 기간에 걸쳐 진행될 수 있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브라질에서는 2014년 3월부터 ‘라바 자투(Lava Jato: 세차용 고압 분사기)’로 불리는 권력형 부패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4년 넘게 계속되는 이 수사를 통해 에너지와 건설 분야에서 각각 중남미 최대를 자랑하는 국영에너지회사 페트로브라스와 민간 건설업체 오데브레시가 연루된 부패 스캔들로 정·재계 유력 인사들이 줄줄이 처벌되고 있다. 권력형 부패수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민간 부문의 비리에 대한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브라질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사법부라는 말이 나올 만한 분위기다.


그러나 돌발변수로 사법부가 옹색해지는 일이 일어났다. 부패혐의로 수감돼 있는 룰라 전 대통령의 신병을 둘러싸고 판사들 간에 석방과 취소 결정이 번복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사법부가 큰 혼란에 빠지는 상황이 초래됐다. 좌파 노동자당(PT)은 변호인단을 통해 룰라 전 대통령이 연방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수감을 피할 수 있도록 석방을 요구하는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을 지역 연방법원에 청구했다. 노동자당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당직 판사가 이를 받아들여 룰라 전 대통령 석방을 명령했으나 사건 담당 판사는 곧바로 석방 결정을 취소했다. 지역 연방법원장과 연방고등법원장도 석방 명령을 취소했고, 특히 연방고등법원장이 룰라 석방을 요구하는 다른 인신보호영장 143건을 모두 기각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되는 듯 했다.


룰라 석방 논란에 얽힌 판사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법무부 윤리위원회에는 해당 판사들에 대한 징계 요청이 속속 접수됐다. ‘반부패 영웅’으로 일컬어지며 룰라 수감을 이끌어낸 세르지우 모루 판사도 징계 심사 대상에 올랐다.


그러나 연방고등법원장이 143건을 기각한 직후 새로운 인신보호영장 수백 건이 재청구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태는 여전히 진행형이 됐다. 이런 와중에 룰라 전 대통령이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변수가 추가됐다.


브라질리아 지역 연방법원 판사는 룰라 전 대통령이 사법당국의 부패수사를 방해했다는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전직 연방상원의원과 경제인 6명에게도 무죄가 선고됐다. 이들은 페트로브라스의 전직 임원에게 플리바겐(유죄 인정 조건부 감형 협상)에 응하지 말도록 매수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 판사의 판단이었다. ‘라바 자투’ 수사로 모두 7차례 기소된 룰라 전 대통령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따라서 앞으로 열릴 다른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등 부패행위와 돈세탁 등 혐의로 지난해 7월 1심 재판에서 9년 6개월, 올해 1월 2심 재판에서 12년 1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고 4월7일 연방경찰에 수감됐다. 수감 상태에서도 룰라 전 대통령은 여론조사에서 가장 강력한 대선주자로 꼽힌다. 룰라 자신은 10월 대선 출마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고, 노동자당 역시 그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다.


브라질 현행법에 따라 룰라 전 대통령이 1심에 이어 2심 재판에서도 실형을 선고 받았기 때문에 석방되더라도 대선에 출마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선거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연방선거법원은 8월15일까지 룰라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대선 출마 여부에 관계 없이 그의 신병을 둘러싸고 사법부 전체가 혼란에 빠진 이번 사태는 그의 정치적 위상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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