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땐 선악이 분명했으니 단순했다, 하지만 지금은…"

[베이비붐 세대 기자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고문

베이비붐 세대 기자들이 퇴임을 앞두고 있다. 1958년생 기자들은 이미 퇴직을 했거나 올해 언론계를 떠난다. 1960년대 초 태어난 이들까지 줄줄이, 몇 년 내 정년을 맞이한다. 현재의 뉴스룸을 일궈낸 한 세대가 물러나는, 분기점이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기자들의 평생은 투쟁으로 채워졌다. 극심한 빈곤과 독재시대를 겪은 유년·청년기를 거쳐 이들의 저연차 기자 시절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보도를 위한 싸움으로 점철된다. 노조와 기자협의회 등 현 언론사 사내 민주화는 그 투쟁의 결과다. 이들은 1990년대 후반 IMF 금융위기를 경험했고, 2000년대 중반부터 진행된 업계의 급격한 사양화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러면서도 언론계를 지켰다. 우리가 맞이한 현재는 그렇게 이뤄졌다. 세상은 조금은 나아졌다. 개개인이 걸어온 오솔길이 현재라는 광장이 된다. 줄잡아 30년 경력 이상 기자들의 생애사에 깃든 번민과 선택이 우리들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 유산에서 한 치라도 더 나아가는 게 남은 자의 몫일 테니 말이다.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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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땐 선악이 분명했으니 어찌 보면 단순했다, 하지만 지금은…”

[베이비붐 세대 기자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고문



1984년 경향신문에 입사한 이대근 수습기자는 지금 같은 회사에서 논설고문을 맡고 있다. 34년차 기자는 내후년 퇴직을 앞뒀다. 입사 동기 중 아직 언론계에 몸담은 건 그뿐이다. 사회부와 정치부, 문화부 등을 거쳤고 국제부장, 정치국제에디터, 논설위원을 맡았으며 편집국장도 지냈다. 78학번인 이 고문은 대학원 재학 당시 몇몇 언론사에 지원서를 냈다가 경향과 연을 맺게 됐다. 취업에 목매던 건 아니었지만 등록금을 계속 댈 수 있을지 고민하던 터였다. 다만 재벌이나 대기업, 은행권은 ‘가지 말아야 할 직장’으로 생각하다보니 선택지가 좁았다. 관제언론의 상징인 경향신문 입사는 결코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 땐데 언론사 전체가 정부 통제 하에 있었고, 특히 경향신문은 사단법인으로 직접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흔쾌하지 않았다. ‘일주일 다니며 언론사라는 데를 좀 보고 나와도 되지’ 했는데 이만큼이 흘렀다”고 술회했다.


순응해서 적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고문은 “경향에 들어온 대가를 스스로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체제 유지에 필요한 게 언론통제였는데 이걸 깨며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 입사 1~3년차 때 죽어라고 했다. 거꾸로 잘 들어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봉급은 대기업인 삼성, 현대보다 높았지만 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어찌 보면 고임금은 그 대가였다.” 마음 맞는 선배들과 정세분석을 하는 서클을 만들었다. 뭘 해야 할지 공부했다. 편집국 변화를 위해 기자들 모임을 만들고 기수별 대표를 뽑았다. 기자들은 시국성명을 내고 간부들은 막았다. “학생운동 비판 기획을 했는데 그 팀에 막내로 들어갔어요. 간부가 ‘어떻게 잘 할지’ 얘기해보자 그러면 다들 ‘학생들이 정당하다’ 얘기만 나왔어요. 결국 기사도 내용이 거꾸로 나와서 못 싣고 해산되고 그랬죠.”


1990년대 경향은 경영 위기를 겪는다. 정권의 언론 통제와는 또 다른, 새로운 위기였다. 한화가 인수하며 ‘조중동’ 임금의 90%까지 근접하기도 했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생존의 기로에 선다. 2000년대 중반 언론 산업이 급격히 사양화되며 ‘생존 게임’ 국면에 접어들었다면 외환위기는 그 신호탄이었다. 남은 경향 기자들은 퇴직금 절반을 출자로 전환했고 일부는 회사를 떠나갔다.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됐을 때도 “4~5년 안에서 죽어라 싸우며 우리도 그렇게 만들겠다”는 열망으로 자리를 지킨 기자들이었다.


이 고문은 “경영독립을 포함해 진정한 언론을 만들기 어렵게 하는 제약은 계속 등장했다”며 “독립언론은 도그마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내부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국장 시절 파격적인 1면 편집, 북한인권에 대한 비판기사, 극우논객까지 포함된 보수필진의 기고를 담으며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킨 배경이다. “한국 언론 습성이 하나의 포인트로 현상을 아주 단순화해서 전하는 거잖아요. 항상 또 다른 측면이 있는 건데. 세상의 절반만 담고서 ‘신문 봐달라’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봐서 그 틀을 깨려고 도발적인 걸 일부러 많이 했어요.”


이 고문은 1959년 경기 파주시 문산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근처에 미군 부대가 있는 마을이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은 하지 않았지만 유인물만 뿌리면 곧장 팔을 꺾고 입을 막아 끌고 가던 사복경찰은 기억한다. 1980년 휴교령이 내려지고 군대에 갔다. 입대 전 간호학원을 수료하고 위생병으로 복무했다.


입사 9년차에 결혼한 그는 슬하에 딸 둘을 두고 있다. 아빠 노릇을 잘 못했다고 여긴다. 온전히 한 생을 기자로 살아온 그는 “실패한 기자”라고 생각한다. 퇴직을 하면 “긴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우리 시절은 몸 던져서 깨뜨리는 어찌 보면 단순한 거였다. 선악이 분명했으니까. 지금은 전선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 혁명으로 언론 정체성에 대한 고민까지 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우리들 때보다 열심히 하고 낫게 하는데도 ‘기레기’란 얘길 듣는다…언론환경은 더 열악해졌다. 쉽지 않은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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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촌지 거부 운동, 그 후부터 우리 기자사회는 많이 달라졌죠”

[베이비붐 세대 기자들] 윤제춘 KBS 해설위원



윤제춘 KBS 해설위원은 1989년 KBS에 입사했다. 최근 KBS 정상화를 위한 파업에 참여했지만 집회 등의 자리엔 나가지 않았다. “보도국 편집회의실 앞에서 피케팅을 하자는 입사 동기도 있었는데 안 나갔어요. 회의 들어가는 게 다 후배들이잖아요. 파업 끝났을 때를 상정해보면 걱정됐어요. 전 회색지대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봐요.” 정권이 바뀌면 보도국 중심과 창가 쪽 자리가 바뀐다. 한쪽은 물을 먹고 다른 쪽은 좋은 보직을 받는다. 윤 위원은 “언론 환경 전체가 어려워서 모두가 합심해도 될까 말깐데 조직 내에서 일부가 방관자를 떠나 안 되길 바라는 속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조직이 어떻게 잘 되겠나”라고 말했다.


1961년생인 그는 80학번 대학 동창이나 또래에 비하면 기자생활을 좀 늦게 시작한 경우다. 은행에서 2년을 근무하다가 KBS에 입사했다. 학교 선배나 친구 중에 기자가 많았다. 은행업무가 지겨워지던 차 민주화 시위를 하던 ‘넥타이부대’를 보며 이직을 결심했다. 당시 은행 월급이 25만원 가량이었는데 수습 시절 60여만 원을 받았으니 직장으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공정보도’를 생각하며 들어온 조직의 현실은 이상과 많이 달랐다. “저연차 시절 당직을 서며 공항출입기자가 보내온 기사를 뉴스에 넣었는데 ‘확인도 안 된 기사를 왜 넣냐’고 간부가 빼더라고요. 그러더니 잠시 후 더 위 간부한테 그 기사를 뺐다고 보고하는 걸 들었어요. 환멸을 느꼈어요. 학교 다닐 때 관악파출소 경찰들이랑 줄 서서 같이 등교를 했는데, 어떻게 치안본부장이 ‘대학에 경찰 보낸 일 없다’고 말하는 뉴스가 나왔는지 알겠더라고요.” 해당 기사는 모 인사가 유력 대통령 후보였던 YS를 비판한 보도였다.


1994년 윤 위원은 회의감과 자괴감으로 회사를 관뒀다가 몇 개월 후 복직하게 된다. 이후 기자생활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DJ정부 말기와 노무현 정부 시절 4년 간 국회반장을 하고 이후 워싱턴특파원과 지국장까지 역임했지만 MB정부부터 “물을 먹기 시작하면서” 귀국 후 국제팀 발령 사흘 만에 시사제작국 수시 장기기획팀으로 쫓겨나기도 한다. KBS엔 부적절한 인사를 막기 위해 발령이 난 지 6개월 이내엔 다시 인사를 못하도록 한 규정이 있는데 보도국장이 ‘저기 인력이 부족하니 가서 잠시 근무해’ 하는 식의 편법을 쓴 것이었다. 지금도 인사기록에 이 팀 근무기록은 기재돼 있지 않다. 왜 그리 ‘미운털’이 박혔냐는 질문에 그는 “남들이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원칙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조직 친화적이 될 수 없었던 거 같다”고 답했다.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걸 안 좋아하는 그다. 대학 시절 운동권 서클에 들어가 의식화교육도 받았지만 “못 먹는 술을 만날 먹는 분위기”고 성향에 맞지 않아 금세 시들해졌다. 가난한 시골 출신으로 “먹고 사느라” 아르바이트 하기 바빴다. 그런 그는 1990년대 말 KBS 노동조합 6대 노보 편집국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KBS 유일한 노조였다. “보수정권 10년 간 후퇴했지만 큰 흐름에서 KBS는 장족의 발전을 했어요. 전 그 원동력이 기자들도 있지만 노조라고 봐요. KBS노조가 역할을 하며 공정성이 확대됐다고 봐요. 노조가 생긴 게 입사 무렵이에요. 정착 하면서 KBS도 같이 발전 해온 거죠.”


윤 위원은 늦게 시작한 기자생활이 행운이라고 했다. 이제 와서 보면 조금은 더 나은 기자로 남게 했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이 생기고 기자들이 촌지거부운동을 하던 1988년 ‘이전’ 과 ‘이후’ 기자사회는 많이 달랐어요. 국방부 출입을 하는데 사단장이 돈을 더플백에 넣어 가져왔는데 눌러봐서 꽉 안 차면 던져버렸다고 했던 선배도 있었거든요…관행이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았으니 완전히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았달까요.”


윤 위원은 “정년까지 3년 정도가 남았는데 후배들이 가진 고민을 덜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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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활 돌이켜보면, 전반 14년은 좋았고 후반 16년은 어려웠네요”

[베이비붐 세대 기자들] 박준수 광주매일신문 주필



박준수 광주매일신문 주필은 1988년 무등일보 공채1기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3년 후 광주매일로 이직해 30년째 나고 자란 지역을 지켜보고 있다. 박 주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부 등을 두루 거쳤고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상무이사와 주필을 겸한다.


그는 동세대 지역 언론인들의 역할에 대해 “지역 언론은 큰 권력이 없다보니 중앙만큼 사회·역사적인 큰 흔적은 남기지 못했지만 권력 감시와 여론 형성이란 본연의 역할을 통해 여러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전쟁이 끝나고 태어난 베이비 부머 중 가정형편이 부유했던 경우는 드물었다. 그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생인 박 주필은 83학번이다. 가난 탓에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자전거포에서 일하고 자개가구·호마이카 가구 공장에 들어가 2~3년을 보냈다. 박 주필은 기자시절 가장 기억에 남은 경험으로 1993년 외근기자 초년병 시절 노동운동 취재현장을 꼽았는데 유년기 경험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였어요. 광주지방노동청을 출입할 땐데 장애인 부부가 공사장에서 일한 대가를 못받고 체불임금 때문에 고통받는 사연을 보도했는데 이후 한 독지가가 도움을 줬다는 연락을 받았어요…사회적 정의감도 컸던 때라 노동자를 대변하는 기사를 많이 썼는데 임원한테 주의도 받고 그랬어요. 지금와서 보면 보람이죠.”


뒤늦게 입학한 대학시절을 박 주필은 또렷이 기억한다. 개인적으론 전공이 아닌 문학에 심취한 시기로 기억되지만 나머지는 “진압경찰이 상주하다 집회가 벌어지면 최루탄을 터뜨리고 잡아가는 게 일상”이던 풍경으로 채워진다. 박 주필은 “사회경험을 하고 군대도 마치고 입학해서 솔직히 적극 동참은 못했다. 방관자로만 있었다”고 돌이켰다. 


1988년 언론자유화로 신생 언론사가 우후죽순 출연했고 기자의 사회적 평판과 영향력도 월등해졌다. 교사, 공무원, 공기업 직원까지 신문사로 몰렸고, 기자는 배우자감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의 파고는 높았다. 광고수입이 줄었고, 모기업마저 경영악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광주매일은 윤전기 등 설비를 리스로 들여와 이자부담도 극심했다. 중앙지들이 경영난 타개를 위해 자전거, 상품권 등으로 지방시장 잠식에 나서며 경영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2001년 광주매일은 문을 닫았다가 1년 만에 우리사주 형식으로 복간했다. 최근 전남광주 지역에선 잇따라 언론사 모기업이 바뀌며 기대감을 높이는 중이다.


“기자생활을 돌이켜보면 전반 14년은 좋았어요. 후반 16년은 어려웠고요. 박사과정을 가고 책을 쓰면서 극복했던 거 같아요. 집사람이 안전판이 돼 줬고요…동기가 25명인데 지금 언론계엔 5명뿐이에요…언론을 선택해서 좋았어요. 자녀들에게 잘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죠. 얼마나 더 있을진 모르겠는데 30년의 결실을 맺을 기회가 주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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