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비가 오니 무더위가 그래도 좀 수그러들었다. ‘기상 관측 이래 최고기온’을 경신하던 8월 초의 그날, 스포츠 중계하듯 기상청의 공식 측정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던 여름. 서울역 근처 쪽방촌을 취재하고 온 기자의 기사엔 찜통 더위 속에 방안에 누워 선풍기 한 대 틀어 놓고 하루를 보내는 어떤 이의 코멘트가 들어 있었다.
“그래야 하루가 가니까 억지로 잠을 청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죠.” 잠을 자야만 시간이 가니까 잔다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그 더운날 오체투지를 하던 쌍용자동차 사람들, 그 옆에서 태극기를 들고 ‘박정희 대통령 말씀’을 외치던 사람들, 이 여름 한국의 풍경이었다.
태풍이 온다고 며칠 전부터 예보가 흘러나오고, 더위를 식혀줄까 가뭄을 해갈해줄까 은근 기대를 해보고, 혹여 엄청난 재난이라도 닥치지 않을까 걱정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보니 ‘재앙이 끊이지 않네’ 하면서 태풍이 오는 게 문재인 정부의 죄악이라도 되는 양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재앙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태풍은 다행히도 예상보다는 적은 피해를 남긴 채 지나갔고, 이번엔 교육당국이 호들갑스럽게 휴교를 하는 바람에 일하는 부모들이 난감했다며 그걸 탓하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왔단다. 이 또한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2003년 프랑스에서 기록적인 더위로 수만 명의 노인들이 숨지고 그 사회의 모순이 모두 드러났을 때,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가 놀랐다. 캐나다 작가 나오미 클라인의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를 읽다 보니 이런 얘기가 나온다. 프랑스에서 폭염 사망자들이 줄을 이었을 때 미국의 ‘기후변화 부정론자’들 중에 일부는 “폭염이 닥치면 우리(미국인들)도 프랑스가 했던 것처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즉 가난한 사람들의 일은 그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맡겨두라는 얘기였다. 그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캘리포니아에서도 노인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이제 가난은 날씨의 형태로 온다. 우리는 얼마나 ‘준비’돼 있나 점검해볼 수 있었던 것은 올여름 무더위가 준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계속해서 날씨 기사를 썼고, 폭염이 재앙이 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려 노력했으나 폭염을 다뤘던 방식을 스스로 돌아보면서 참 부족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더위와 태풍이 보여주는 사회의 단면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향으로 대응의 가닥을 잡아야 할까. 더위를 만들고 기후재앙을 만드는 체제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었나.
국가와 사회의 대응도 중요하지만 그 근본 원인에 대해, 에너지 소비에 대해, 한국이 포함돼 있는 글로벌 경제체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근본적으로 파고들어가야 할 것인가 계속 고민을 하게 될 것 같다. 겨울은 또 혹독하게 추울 것이고, 여름은 계속 더워질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