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토요일, 나는 성대한 결혼식에서 축사를 했다. 사람들은 ‘선남선녀’의 결합을 축복했고 신부와 신랑은 환하게 웃었다. 같은 시각, 동인천역 북광장 일대에서는 퀴어 문화축제에 참여한 이들이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하 반대 세력)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었다. 성소수자의 인권과 성적 다양성을 위한 퀴어 문화 축제는 2000년 서울에서 처음 개최되었고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열렸다. 인천에서는 처음인 이번 퀴어 문화 축제는 그러나 반대 세력의 방해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현장의 상황들을 전해 들으면서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인천 첫 퀴어 문화 축제…반대 세력 저지 충돌”, “맞불 집회로 무산”, “몸싸움·고성 오가며 행사 무산”, “시민 반대로 무산….” 헤드라인만 보면 비슷한 규모의 인원들이 대등하게 ‘갈등’을 겪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현장 상황이나 양측 참가자들의 인원수 차이, 대응 과정 등을 보면 그것은 갈등이나 충돌이 아니라 일방적 폭력과 가해였다. 반대 세력은 퀴어 문화 축제에 쓰일 차량을 펑크냈고, 축제가 열릴 장소를 둘러싸거나 드러누웠다. 축제 참가자들에게 폭언과 욕설을 쏟아냈으며 깃발을 꺾는 등의 물리적 제지와 폭행도 가했다. 경찰의 소극적 대응 또한 비판의 대상인데, 반대 세력은 결국 경찰까지 공격했다(9일 인천 중부 경찰서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반대세력 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러한 경위를 모른 채 언론 보도만 본다면, 토요일의 사태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세력끼리 충돌”한 사건으로 보일 여지가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대부분은 소수자들의 사정을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흔히 뉴스, 기사는 ‘팩트’라고 한다. 이때 사실은 강력한 권위를 지닌다. 그러나 기사도 결국 쓰는 자의 시선과 해석이 반영된 일종의 편집본이다. 트린 민하가 다큐멘터리를 “광적으로 조작된 픽션”이라고 칭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우리가 손에 쥐는 팩트란 선별과 배제와 의도를 거친 구성물일 수밖에 없다. 팩트라는 기사 안에서 일가족을 살해한 가장의 절절한 심정이 추측, 묘사되거나 성범죄 피해자의 신원이 가해자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폭력이나 습격 대신 마찰이나 충돌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때 무엇이 부각되고, 무엇이 은폐되는가? 이렇게 구성된 팩트는 어떤 층위에 있고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가?
물론 이를 명확하게 ‘폭력 사태’라고 규정한 언론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팩트는 현실의 뒤엉킨 맥락을 섬세하게 발라내고 어떤 의미의 진실인지 규명하는 작업일 것이다. 지난 토요일, 어떤 사랑은 축복 받고, 어떤 사랑은 혐오와 폭력의 대상이 됐다. 어떤 사람들은 환대 받고, 어떤 사람들은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고 지워졌다. 이런 세계에서는 어떤 것이 팩트인지, 필요한 팩트가 무엇인지 판단하고 전달하는 감각이 너무나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