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의 나라

[스페셜리스트 | 법조] 백인성 머니투데이 기자

백인성 머니투데이 기자 13세기 원나라가 약해지자 하북과 강남 일대에서 도적이 크게 발호했다. 유행하던 백련교를 바탕으로 일어난 도적들은 ‘황색(황제의 색)은 적색이 이긴다’며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다. 홍건적(紅巾賊)이다. 개중 우두머리 서수휘란 자는 황제를 참칭했다. 마음껏 욕심을 채우겠다며 기수를 도읍으로 삼아 ‘천완국’이란 나라를 세웠다. 치평(治平)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연호도 정했다. 기존의 국법이 통하지 않는, 도적들이 세운 ‘나라 안의 나라’였다.


21세기 한국에도 천완국과 비슷해 보이는 곳이 있다. 사법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짜고 대법원과 하급심 재판 과정과 결과에 개입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의해 재판해야 할 사법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재판을 두고 권부와 거래했다는 믿기 어려운 의혹이다. 상고법원 입법을 위해 국회와 청와대 및 특정 언론사와 접촉을 시도하고 해당 기관에 대해 압박과 회유, 로비 등을 시도했다는 의혹, 영장 없이 국민을 체포할 수 있도록 하고 상고법원과 맞바꾸려 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와 권한 다툼에서 앞서고자 파견 판사를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평의내용 및 인사평판 등 내부정보를 유출하고, 판사 보호를 위해 일선 영장전담법관들을 통해 검찰이 청구한 영장에서 사건 수사기밀을 빼냈다. 상고법원 추진 명목으로 일선 법원에 배정된 공보관실 예산을 현금으로 인출해 인편으로 법원행정처 예산담당관실 금고에 보관하다가 법원장들에게 ‘마음대로 쓰시라’며 나눠줬다. 나라에서 홀로 재판권을 가진 법원이다. 사실이라면 심판 스스로 당장 퇴장당해 마땅한 반칙왕이다.


13일 오전 서울 대법원 앞에서 열린 '참단한 사법부 70주년, 사법적폐 청산하라-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 기자회견'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발언을 잇고 있다. 뉴시스

 

문제는 심판을 누가 심판할 수 있느냐다. 의혹을 조사하려던 검찰은 번번이 문만 두들기다 돌아온다. 수사기관이 압수·수색·체포·구속 등의 강제수사를 하려면 사법부가 발부한 영장이 필요한데 이를 내주지 않고 있어서다. 법원은 의혹 연루 법관들에 대해 검찰이 2개월간 청구한 300여건의 압수수색 영장을 대부분 기각했다. 5년간 전국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 평균 발부율은 89.2%였지만 최근 사법농단 의혹 관련 영장 발부율은 10% 내외다. 전직 대법관들에 대한 영장 발부는 제로다. 범죄 단초를 아예 조사조차 말라는 태도다. ‘불멸의 신성가족, 나라 위 사법국’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대한민국 헌법은 법원의 장(章)을 따로 만들고 사법권이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며 사법부의 독립된 위상을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입법자들이 이렇게 사법부의 헌법상 지위를 보장한 건 ‘법관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대전제를 믿었기 때문이다.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사법부를 만들어, 궁극적으로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의도였다. 헌정질서를 뿌리부터 뽑아냈다는 의혹을 받는 법관들까지 보호하겠다는 취지는 아니었다.


‘재판의 본질 침해 가능성이 있다’는 문구가 전가의 보도처럼 기각 사유로 나온다. 법조계에선 “지금까지 드러난 사법부 의혹만으로도 재판의 본질이 침해되다 못해 이미 없어진 상황”이라며 코웃음을 친다. 훗날 기억될 올해 사법부의 모습이 법비(法匪)들이 세운 ‘나라 안의 나라’로 기억될까 겁난다. 천완국은 9년 만에 내분으로 망했다. 서수휘는 참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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