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업주와 과학자, 행정가들이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여러 노동조건과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지켜봤다. 과학자나 정책 결정권자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것을 가리켜 나는 ‘공감 격차’라고 부른다.”
캐나다 여성 ‘인간공학자’인 캐런 메싱의 <보이지 않는 고통>(김인아 외 옮김. 동녘)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반도체 공장 백혈병이나 타워크레인 사고 같은 ‘사건’이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은 늘 혹은 자주 아프다. 뭔지 모를 유해물질을 다루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지만 일상의 어떤 단순한 작업 때문에 종일 다리가 아프고 발이 붓고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람들이 일하는 과정을 관찰하고 고통의 원인과 해법을 찾는 것이 저자가 하는 일이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병원의 청소노동자, 백화점 점원, 콜센터 직원, 교사 같은 평범한 이들이다. 병원에서 아픈 사람을 두 팔로 들어 옮겨야 하는 사람들의 노동, 간병인들의 ‘팀워크’만 존중해줘도 그 힘겨움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다는 사실, 상점의 점원에게 의자만 놔줘도 다리 통증이 사라질 텐데 ‘손님들이 건방지다고 본다’며 서 있으라 강요하는 업체들, 언제 일하라는 전화가 올지 몰라 가정생활마저 흔들리는 사람들, 학생들에 대한 애정조차 숫자로 측정당하는 교사의 괴로움 같은 것들이 메싱이 관찰하고 알아낸 사실들이다.
사실 우리도 다 아는 얘기들이다. 왜 이마트 직원은 의자에 앉지 못할까, 간병인들의 임금은 저렇게 적을까, 청소노동자에겐 휴게실이 없을까. 저자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는 것은 ‘배운 이들’과 노동자 사이를 끊어놓는 공감의 부재다. 거대 기업들은 과학자들의 공감을 ‘구매’할 수 있지만 노동자들에겐 그런 힘과 돈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계층의 문제에 공감한다. 과학자들은 식당 직원들보다 박물관 방문객에게 더 동질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식당 직원들에게 의자를 마련해줄 수 있도록 하는 연구는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직업이 직업이므로, 이런 구절들을 읽으면서 기자들이 공감을 대입하는 사회계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전 국내 법률학회지에 실린 논문을 읽어본 적 있다. 스스로 ‘가난하게 자랐다’고 생각하는 판사들일수록 ‘생계형 범죄’에 관대했다. 돈이 없어서 물건을 훔친 사람을 엄벌하기보다는 그들의 사정에 공감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 반대도 물론 사실이었다. 어려운 경제형편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고 응답한 법관들은 생계형 범죄를 강하게 처벌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계층에 공감하느냐’는 ‘누구를 위해 기사를 쓰느냐’와 직결된다. 그런대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입시 명문고와 ‘상위권 대학’을 나온 이들 중심으로 저널리스트 사회가 구성되면서, 언론에서도 공감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 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