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8일, 사복경찰 수백 명이 KBS 본관 건물에 들이닥쳤다. 당시 한나라당이 추천한 KBS 이사 6명이 정연주 사장의 해임 제청을 결의하기 직전이었다. 이사회가 열리는 본관은 경찰에 의해 차단됐고, 저항하는 KBS 직원들은 제압당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경찰의 난입으로 정 사장 해임 제청안은 통과됐다. 사복경찰이 공영방송 KBS에 밀려든 것은 독재치하에서도 볼 수 없는 살풍경이었다. KBS 구성원들은 이를 ‘8·8 사태’로 명명했다.
꼭 10년 만이다. 지난 23일 경찰은 KBS 진실과미래위원회(이하 진미위) 사무실 압수수색을 시도했다. 수사관 10여 명이 영장을 보이며 압수수색을 집행하려 했지만 KBS 직원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언론은 법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신성불가침도 아니다. 그러나 권력을 감시하며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권력의 간섭과 개입을 최소화 하는 일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해당한다. 압수수색이 시도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경찰의 이번 시도는 여러모로 적절치 않다.
사건은 지난 7월 보수성향인 KBS 공영노조의 고발로 시작됐다. 진미위 조사관들이 피조사자들의 이메일을 불법적으로 열어봤다는 내용이다. 경찰은 8월 말 고발인 조사만 마친 뒤 9월 초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다. 피고발인 조사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강제수사를 시도한 것이다. 검찰은 “이메일 사찰에 대한 물적 증거가 없고 증언에 의한 자료 뿐”이라며 영장을 기각했다.
이후 공영노조는 KBS 전산 서버 데이터에 대한 증거보전 신청을 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지난 2일 증거보전명령이 집행됐다. 이 과정에서 KBS는 공정성을 담보하고자 경찰에 입회 요청을 했지만 경찰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증거보전명령 집행에는 고발인인 공영노조 측 변호인과 IT전문가만 입회했다. 수사의 핵심인 이메일 서버 기록을 추출하는 과정에 정작 경찰은 참여하지도 않은 채 압수수색을 시도한 것이다.
압수수색 범위도 문제다. 경찰은 고발 내용과는 무관한 진미위 조사관 개인 PC 전체를 압수하려고 했다. 경찰이 가진 것은 “진미위 조사관들이 내 이메일을 들여다본 것 같다”는 조사대상자의 주장이 담긴 고발장 한 장이다. 이를 근거로 상당수가 기자인 진미위 조사관들의 개인 PC까지 들여다보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취재는 기자와 취재원의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취재원이 자신의 신원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느낀다면 기자에게 입을 열 수 없다. 수사기관이 임의로 기자의 취재 내용을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언론자유는 심각하게 위축된다. 언론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신중히 해야 하는 이유다.
압수수색이 시도됐던 지난 23일은 공교롭게도 KBS 차기 사장 공모 절차가 진행되던 민감한 시기였다. 하루 전인 22일엔 11명의 후보 중 양승동 현 사장을 포함한 3명의 최종 후보가 발표됐다. 과거 KBS의 불공정 보도와 부당징계 등을 조사하는 진미위는 양승동 사장 체제 출범 뒤인 지난 6월5일 활동을 시작했다.
때문에 일각에선 경찰이 사장 선임 과정에 영향을 미치려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번영을 누리는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수사기관이 공영방송 사장 선임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의심을 받는 것 자체가 참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