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저 장난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앳된 얼굴의 여자가 검지손가락으로 연신 꼬맹이의 이마를 밀고 있었다. 주의를 기울여보니 “이 바보새끼가” “멍청아” 따위 말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아이는 서너 살쯤이나 됐을까. 저 상황에 개입해야 할까, 혹은 개입해도 될까…. 고민하던 사이 두 사람이 버스에서 내렸다. 여자는 아이가 메고 있던 어린이집 가방을 거칠게 낚아채 길 위로 던지듯 아이를 하차시켰다. 나처럼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한 할머니가 낮게 혀를 찼다. 버스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머뭇거렸던 기억은 죄책감이 되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이지원 감독은 머뭇거림에 머물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이웃집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반복됐다. 복도에서 마주친 그 집 아이의 눈빛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준비하던 작품이 엎어지는 등 자신도 힘든 상황이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마 그도 나처럼,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테다.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문화가 여전한 사회다. 외부인의 오지랖이 오히려 아이를 더 괴롭히게 될지도 모른다. 고민하는 사이 아이는 이사를 갔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감독은 한 달 만에 아동학대를 주제로 한 <미쓰백>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자막 한 줄이 뜬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영화보다 잔혹하다. 어제 일어난 사건은 오늘 더 참혹한 모습으로 돌아와 언론에 반복적으로 오르내린다. 분노는 잠깐이고, 대책은 더디다. 아이들은 지금도 부모와 사회의 적극적 방치 속에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얼어 죽는다.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접수된 학대당하는 아동 숫자가 한해 1만8700여 명이다. 이중 36명이 죽었다(2016년 기준). 전문가들은 이 숫자를 ‘빙산의 일각’으로 본다.
<미쓰백>은 학대 아동 ‘지은’이 있었던 자리에 관객을 데려다 놓는다. 더러운 맨발과, 때 낀 손톱과,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옷과, 멍든 몸이 쭈그리고 있던 공간에 관객은 98분간 꼼짝없이 붙들린다. 폭력의 재현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여기 있다. 아동 학대 혐의로 조사 받던 게임 중독자 아버지가 영화 속에서 경찰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내가 애새끼일 때는 맞고 크는 거 무시하더니…. 이렇게 살면 뭐해. 보고 자란 게 이런 건데, 쟤라고 살아서 다르겠어요?”
영화는 영화라서 가능한 결말로 달려간다. ‘살아남은 아이’를 감당하는 주변인들이 보여주는 우정과 연대는 눈물겹게 아름답다. 하지만 현실은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미쓰백>을 본 관객에게는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이 남는다. 한 아이를 이전과는 다르게 살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와야 할까. 개인의 구제와 연민에 기댄 채 굴러가는 사회는 대체 무슨 쓸모와 소용을 갖는 걸까.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