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쓰는 부사(副詞)는 안녕한가

[스페셜리스트 | 문화] 박돈규 조선일보 주말뉴스부 차장

박돈규 조선일보 주말뉴스부 차장. 마흔 살에 난생 처음 대장 내시경을 받았다. 날마다 불을 뿜는 상사나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말단 직원이나 검진복을 입으면 순한 양 같다. 그 틈에 앉아 40년 만에 들여다볼 창자 속을 상상했다. 자못 불안했다.


이달 초 부사(副詞) 추적 조사를 의뢰할 때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질병에는 대체로 징후가 있다. 언어 생활도 마찬가지다. 번성하는 말과 쇠락하는 말이 그 사회를 가늠해준다. 어떤 부사를 점점 더 쓰고 어떤 부사를 덜 쓰는지 파악하면서 대중의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김한샘 연세대 교수가 1950년대부터 올해까지 신문기사(말뭉치)를 대상으로 변화 폭이 클 것으로 의심되는 부사 25가지를 추적했다. ‘더’ ‘가장’ ‘잘’ ‘정말’ ‘굉장히’ ‘엄청’은 사용 빈도가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무릇’ ‘넌지시’ ‘짐짓’ ‘사뭇’은 점점 덜 쓰고 있다. ‘넌지시’는 1950년대와 견주면 7분의 1로 감소했다.


빈도나 강도를 나타내는 부사는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말을 부드럽게 해주는 부사는 사라지고 있다. 문어체에 자주 보이던 부사 ‘극히’ ‘심히’도 빈도가 급감했다. SNS를 사용하면서 말과 글 사이에 격차가 줄어들고, 주로 문어에서 쓰던 부사들이 세력을 잃은 것이다. 김한샘 교수는 “일상어보다 정제된 문장을 쓰는 신문기사에서 어떤 부사를 몇 배씩 더 사용하거나 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양상이 크게 바뀐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주장이나 감정을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싶어한다. 인간관계가 복잡해지고 감정 노동이 늘어나고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는 등 사회 변화를 겪으며 생긴 불안감의 반영이다. 강한 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부드러운 부사만 쓴다면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작가 스티븐 킹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뒤덮여 있다”고 일갈했다. 글쓰기로 밥벌이하는 사람이라면 새겨들을 충고다. 하지만 나는 절반만 동의한다. 부사가 죽은 문장을 살려낼 때도 더러 있으니까. 언어는 쓰지 않으면 다채로움을 잃는다. 동사도 단조로워지고 있다. 1990년대까지 ‘(입을) 가시다’와 ‘(그릇을) 부시다’는 소설 말고 일반 산문에서도 썼는데 지금은 붙박이처럼 ‘씻다’로 뭉뚱그린다.


단순히 부사 사용법만 달라진 게 아니다. 극심한 경쟁사회로 가면서 ‘언어 인플레이션’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 오늘 모실 손님은 VIP가 아니라 VVIP라야 한다. 호칭도 ‘부사장’은 ‘사장’, ‘부국장’은 ‘국장’이라고 부풀린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설렁탕을 주문할 때도 ‘특설렁탕!’을 외쳐야 마음이 편해진다.


세상이 독해지니 말도 글도 독해진다. 검진센터가 붐비는 연말, 신문 기사에도 건강검진이 필요하다. 자문해볼 일이다. 당신이 쓰는 부사는 과연 안녕한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