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동 KBS 사장이 지난 12일 취임식을 열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고대영 전 사장이 해임된 이후 고 사장의 잔여 임기를 이어온 지 8개월 만이다. 양 사장은 앞으로 3년 동안 공영방송 KBS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양 사장과 KBS가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지난 10년 간 KBS는 지속적으로 쇠퇴했다. 전 정부들의 보도 개입 등 제작 자율성 침해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미디어 콘텐츠 시장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KBS가 사실상 독점적으로 누려오던 영상 콘텐츠 공급자이자 지상파 플랫폼 사업자로서의 위상은 인터넷과 모바일의 등장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넷플릭스 등 기술과 자본을 앞세운 외국 OTT 사업자들의 국내 시장 진입도 활발하다.
국내만 보더라도 종편과 상업미디어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광고 시장도 이에 반응해 KBS의 올해 적자는 수백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양 사장은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세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첫째로 신뢰도와 영향력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것이다. 때마침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 KBS의 세월호 보도에 개입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던 이정현 의원에 대해 법원이 유죄를 인정했다. 정치권력이 취재와 보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던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양 사장이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법원의 이번 판결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최근 KBS는 미디어미래연구소가 개최한 2018년 미디어어워즈에서 가장 신뢰받는 미디어 2위에 올랐다. 2010년까지 1위였던 KBS는 그동안 4~5위를 맴돌다가 지난해 순위권 밖으로 사라졌다. 양 사장 취임 이후 신뢰도와 공정성 순위가 상승한 것은 과거의 문제를 청산하겠다는 노력 덕분으로 읽힌다. 하지만 KBS가 1위 자리를 되찾겠다고 한다면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권력 감시와 비판이라는 언론의 본령은 정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양 사장은 지상파뿐 아니라 온라인과 모바일에서도 충분한 도달률을 갖는 것이 두 번째, 구성원들이 창의성을 높일 수 있도록 효율적이고 유연한 조직을 만들겠다는 것이 세 번째 목표라고 밝혔다. 급변하는 미디어 시장 상황을 볼 때 이는 KBS가 해결해야 할 당면한 과제다. KBS의 콘텐츠 경쟁력 저하는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비대한 조직과 방만한 경영 역시 수십 년 동안 곯을 대로 곯은 문제다. 인터넷과 모바일에서의 콘텐츠·플랫폼 전략을 이제 와서 짜겠다는 건 늦어도 한참 늦은 일이다. 결국 양 사장의 목표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지금 상황에서는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도 없다. 중요한 건 목표를 이룰 만한 실력과 리더십을 갖췄느냐다.
양 사장은 취임식에서 “지금이야말로 공영방송의 시대입니다(I profoundly believe that now is our time)”라는 BBC 토니 홀 사장의 말을 인용했다. 너무 많은 콘텐츠가 넘쳐나는, 그래서 가짜뉴스와 같은 쓰레기 정보와 저질 콘텐츠가 만연한 시대에, 역설적으로 공영방송이 더욱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공영방송의 시대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그 시대는 KBS가 직접 만들어 나가야 한다. 양 사장이 제시한 목표를 모두 이룰 때야 비로소 공영방송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