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기자들'과 트럼프 비판 금지령

[글로벌 리포트 | 미국] 국기연 세계일보 워싱턴 특파원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최근 ‘2018 올해의 인물’로 지난 10월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에서 살해된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등 언론 자유와 진실을 수호하다 숨지거나 탄압받은 언론인들을 선정했다. 수상자의 공식 타이틀은 ‘수호자들과 진실을 위한 전쟁’이다.


올해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진보 성향의 주류 언론이 혈투를 벌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포스트(WP), 뉴욕타임스(NYT), CNN 등을 ‘가짜 뉴스’로 규정하고, 기자들을 ‘공공의 적’이라고 매도했다.
미국 언론도 이에 질세라 트럼프 대통령을 매일같이 난도질했다. 미국의 연구기관인 미디어리서치센터(MRC) 조사에 따르면 올해 6월1일부터 9월30일까지 ABC, CBS, NBC 등 방송 3사의 1007개 뉴스 아이템에서 트럼프에 관한 보도의 92%가 부정적인 내용이었고, 긍정적인 뉴스는 8%에 그쳤다.


미국 언론이 ‘트럼프 강박관념’(Obse ssion with Trump)에 빠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 분석에 따르면 CNN, 폭스 뉴스, MSNBC가 버락 오바마와 트럼프 대통령 시절인 지난 9년 동안 현직 대통령에 관한 뉴스를 보도한 시간이 오바마는 전체 뉴스 시간의 3~5%가량이었으나 트럼프는 이보다 3배가량 많은 13~17%에 이른다. 트럼프와 언론이 ‘적대적 공생 관계’로 서로 윈-윈 게임을 했다는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폭스 뉴스 등 보수 성향의 일부 ‘친 트럼프’ 언론사와 진보 성향의 ‘반 트럼프’ 언론사는 모두 객관성과 중립성을 잃은 채 당파 싸움에 매몰됐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트럼프의 언론과의 전쟁에서 사각지대가 부각된 것도 특징 중의 하나이다. 미국의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최근 외국 언론이 대체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극구 자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정치적, 종교적으로 반 트럼프 성향이 강한 독재 국가의 정권이 ‘트럼프 비판 금지령’을 내렸다고 폴리티코가 전했다. 이 매체는 그 대표적인 나라로 북한, 중국, 러시아, 터키를 꼽았다. 이들 국가의 언론은 때로 미국을 비판하면서도 트럼프 대통령 개인을 걸고넘어지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미국이 자국에 불리한 정책을 추진하는 배후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라 그의 정적 또는 딥 스테이트(deep state)로 불리는 숨은 권력자들이 포진하고 있다며 트럼프 편들기에 나선 것도 이들 독재 국가 언론에서 나타난 공통된 현상이라고 폴리티코가 강조했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지난 9월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 정권의 의중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외무상은 9월29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미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책임을 트럼프 대통령 반대 세력에 돌렸다. 그는 “미국의 정치 반대파들은 정적을 공격하기 위한 구실로 험담을 일삼고, 무리한 일방적 요구를 행정부에 강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잘해 보려고 하는데 반대파 인사들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얘기이다.


북한 등이 ‘미국’과 ‘트럼프’를 분리해 대응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트럼프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자국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계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외국 언론에 난 자신을 비판한 기사에 관해 보고를 받은 뒤 트위터로 즉각 반격에 나서면 백악관 등 미국 정부 관료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구미에 맞도록 그 나라에 징벌을 가하는 정책을 동원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뿐 아니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모두 트럼프를 유리그릇처럼 대한다.


트럼프는 새해에 집권 3년차를 맞는다. 그는 내년 말에는 2020년 대통령 선거 준비에 돌입한다. 트럼프는 올해에 이어 새해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최고 글로벌 뉴스 메이커 자리를 지킬 게 틀림없다. 이런 트럼프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언론에 중대한 도전이자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인 ‘수호자들과 진실을 위한 전쟁’이 던진 메시지 중의 하나가 트럼프 시대의 언론 좌표 재정립이 아닐까 싶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