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웃는 새해를 기다리며

[언론 다시보기] 이진송 계간홀로 편집장

이진송 계간홀로 편집장. 일부러 비속어를 연상하도록 발음하는 이들이 넘치던 2018년이 저물고, 드디어 2019년이다. 그러나 새해의 전망도 그다지 밝지 않다. 해를 의미하는 ‘년’은 자주 언어유희인 척, 센스 있는 척 욕설의 동음이의어로 쓰였다. 기해년(己亥年) 황금돼지의 해, ‘돼지X’이라고 낄낄거리는 사람들이 벌써 한트럭이다. 2016년에 장애인 비하를 유머로 소비하던 장면이 아직 선명한데 말이다.


새해에는 웃을 일이 더 많기를 바란다. 동시에 더 많은 웃음이 사라지기를 원한다. 후자의 웃음은 차별과 혐오를 기반으로 한 폭력성을 띤다. 휘어진 눈꼬리와 호의적인 소리만으로 쉽게 누군가를 공격하고, 배제하고, 삭제한다. 그 부드러운 선 때문에 폭력이나 차별이라고 인지하기 힘들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면 ‘진지충’, ‘예민보스’, ‘킬조이’(kill joy, 흥을 깨뜨리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해마다 반복되는 ‘~년’ 말장난이 재미있는 사람들의 웃음은, 한 번도 진심으로 ‘년’이라는 욕의 과녁이 된 적 없기에 그토록 무결하다. 안전해서 악랄하다. 


비만 인구, 외국인의 발음, 톤이 어두운 피부, ‘정상’이 아니라고 간주되는 신체, 성소수자, 성별고정관념에서 비어져 나온 특성, 서울 시민만의 정보, 특정 지역에 대한 유비, 비 인간 동물에 대한 착취, 불법촬영물에서 파생된 밈(meme)…. 많은 웃음 코드는 비하와 조롱에 기대고 있다. 무엇이, 왜 우스운지에 대한 성찰 없이 재미만을 탐닉하는 분위기는 순식간에 특정한 맥락 안에서 만들어진 부적절한 표현을 확산시킨다. 그 과정에서 의미가 훼손되고 오염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빚투’가 그 예시이다.


2018년은 미투 운동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한 해였다. 여성들은 자신의 피해를 증언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강간 문화의 고리를 끊고자 했다. 그러나 연예인 가족의 채무 관계 폭로를 ‘빚투’라고 부르는 순간 의미와 투쟁은 지워진다. 행위는 희화화되고, 서로의 증언에 용기를 얻는 연쇄적인 발화를 ‘이때다 싶어 나서는’ 행위로 뭉개버렸다. 그럼에도 ‘빚투’는 센스 있는 신조어 취급을 받으며 한동안 활개를 쳤다.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정서가 폭력의 증언과 투쟁을 말장난으로 치환해버렸다.


떠나보내야만 하는 웃음이 있다. 작년 한 해 나는 많은 웃음과 결별했다. 내가 사용하지 않게 된 표현부터, 아무렇지 않게 폭력적인 웃음을 강요하는 사람들,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콘텐츠 등. 한참 멀었다. 소수자를 분할하고 배제함으로써 가능한 웃음은 여전히 도처에 널려 있다. 새해 목표 중 하나는 작년보다 덜 웃는 것이다. 재미와 웃음에 과도하게 부여된 면죄부를 청산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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