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도우미'로 전락한 법원과 법치주의

[스페셜리스트 | 경제] 곽정수 한겨레신문 경제선임기자·경제학박사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31일 대구고법 형사1부(재판장 박준용)는 현대차 2차 협력사인 태광공업 전 경영진인 손영태 전 회장과 손정우 전 사장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공갈) 혐의로 징역 2년6개월과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부자 간인 두 사람은 재판 직후 포승줄에 묶여 같은 호송차에 올랐다. 아버지인 손 전 회장은 70대 고령으로 병치료를 받아왔다. 이를 지켜보던 한 중소기업인은 “이렇게 가혹할 수 있느냐”며 눈물지었다. 한 법조계 인사도 “재벌총수가 수천억 규모의 불법비리를 저질러도 부자에게 모두 실형선고를 하는 일은 없다”고 탄식했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치러진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과도 배치된다. 손씨 부자는 현대차 1차 협력사인 서연이화에 오랫동안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갑질’을 당해 부도위기에 몰리자 부품공급이 어렵다고 알렸다. 서연이화는 생산 차질을 피하려고 태광공업의 경영권을 인수했으나, 이후 태도가 돌변해 손씨 부자가 부품공급 중단을 위협하며 회사를 팔았다고 고소했다. 손씨 부자는 공급중단 통보는 부도위기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서연이화의 인수는 경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서연이화의 고소는 갑질에 고통받는 수많은 중소기업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9명 중에서 3명은 경영권 인수가 서연이화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인정했고, 2명은 아예 무죄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무시하고 ‘갑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갑질이라는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 채 “피고인들이 반성은커녕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을 반복하며 범행을 전면 부인하고, (중략) 피해회사를 부도덕한 갑질 기업으로 비난한다”고 밝혔다. 이는 서연이화의 대리인인 김앤장이 제출한 의견서를 사실상 그대로 읽은 것이다.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1심재판에서 드루킹 댓글 조작사건 연루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뒤 여당이 재판부를 비난하자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태광공업 판결에 대한 비판도 비슷한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민주주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구현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사법부는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법부의 공정한 법적용을 전제로 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혐의로 기소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사법부 스스로 국민 불신을 자초하지는 않았는지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태광공업 사건에 대한 최종 판단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대법원에는 이미 여러 유사사건들이 올라가 있다. 국민은 2017년 촛불혁명과 대선을 통해 갑질근절을 포함한 경제민주화를 시대적 과제로 요구했다. 사법부가 ‘갑질 도우미’로 전락한다면, 더 이상 법치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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