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빅뱅 직전 같았다. 알 수 없는 긴장이 한반도를 종횡으로 분주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 위치한 경성부는 차분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곳곳에서 뜨거운 피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논픽션그룹 실록’(이하 실록)이 <역사 논픽션 3·1운동>에서 묘사한 1919년 2월28일, 식민 도시 경성의 모습이다. ‘혁명’을 하루 앞둔 그 날 밤 경성부 가회동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랑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들이었다.
현직 기자 6명이 참여하는 실록이 지난달 <역사 논픽션 3·1운동>을 펴냈다. 책에선 100년 전 그 날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인물들도 다시 살아난 듯하다. 실록 기자들이 수많은 인물의 발자취를 세밀하게 좇은 덕분이다. 한반도뿐 아니라 당시 일제 지도층과 일본 언론의 움직임, 국제 정세까지 꼼꼼히 살폈다. 소설 같은 문체지만 철저히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3·1운동 통사(通史)다.
기자 6명은 실록이란 이름으로 2017년 처음 모였다. 같은 출입처에서 친분을 쌓은 김용출 세계일보 기자(현 정치부장)가 장윤희 연합뉴스TV 기자(당시 뉴시스)에게 제안한 논픽션 쓰기 동아리가 그 시작이었다.
실록 대표를 맡은 김용출 기자는 이미 10여년 전 논픽션에 눈을 떴다. 장애인 인권운동가 ‘최옥란 평전’(2003),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삶을 조명한 ‘독일 아리랑’(2006), 국정농단 사태를 다룬 ‘비선 권력’(2017) 등 논픽션을 여러 권 썼다.
“논픽션은 퓰리처상 수상 부문에도 포함돼있는데, 우리나라에선 미운 오리 취급을 받는 것 같아요. 그래도 먼저 뛰어들어보자는 거였죠. 논픽션과 저널리즘을 결합한 ‘탐사 논픽션’ 콘셉트로요. 장윤희 기자와 뜻이 맞았어요. 페이스북에 공지를 올려 회원을 모집했습니다.”(김용출)
논픽션 쓰기 모임에 이천종·박영준·이현미·조병욱 세계일보 기자가 합류했다. 모두 책을 낸 경험이 있었다. 멤버 6명은 2017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모임 이름을 ‘논픽션 그룹 실록’으로 지었다.
먼저 주제를 3·1운동으로 정하고 취재할 분량을 나눴다. 매달 한 차례 만나 토론하면서 자료를 점검하고 보완했다. 기자들은 현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작업했다. 당시 국회를 출입하던 장윤희 기자는 국회도서관에서 자료를 복사해 퇴근길 지하철에서 읽곤 했다. 다른 기자들도 비슷한 일상이었다. 이후 맡은 분야마다 원고를 쓸 땐 다들 ‘주말 작가’로 변신했다.
막판 작업에 접어든 지난해 12월엔 매주 모여 책의 초고를 통독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소리 내 읽어야 더 와 닿는다”는 김용출 기자의 제안이었다. 통독은 예닐곱번이나 이어졌다. 지난해 12월23일 마지막 읽기를 끝냈을 때, 회원 모두 진한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기자는 정보의 최전선에 있지만 휘발성이 강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루를 열심히 살아도 다음날이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요. 그런 고민이 있던 중에 긴 호흡의 논픽션을 쓰면서 배운 게 많아요. 중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를, 기자로서 대중적이고 쉽게 써내는 법도 알게 됐고요. 공동 작업도 의미 있었어요. 책 출간은 팀워크의 결실이자 탁월한 리더 덕분이기도 합니다.”(장윤희)
6명이 모여 책을 내기까지 꼬박 1년 5개월이 걸렸다. 636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1919년 2월부터 3월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하는 9월까지 3·1운동의 전체상을 세밀하게 담았다.
“한국 사람이라면 3·1운동을 잘 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건 정말 단편적이더라고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작은 사실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특정 기사가 몇 면에 나왔는지 알아보려고 1900년대 신문 마이크로필름을 한두 시간씩 살피고, 조금이라도 의심쩍은 자료가 있다면 또 다른 문헌을 참고하고요. 그동안 세상에서 받은 감사함을 여기에 갚아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조병욱)
함께 책을 펴내며 시즌1을 마무리한 실록은 시즌2를 준비한다. 기자마다 따로 논픽션 단행본을 내겠다는 목표다.
“논픽션의 가능성을 봤어요. 학자의 전문성, 작가의 문장력 그 중간지점에 있는 기자가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장르가 논픽션이에요. 기사의 팩트가 가진 힘도 크지만 역사적 사실을 소설처럼 풀어내는 논픽션도 큰 감동을 주거든요. 이번 책은 역사의 지평을 넓혔다는 의미도 있고요. 다른 기자들도 논픽션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이천종)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