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를 보는 시선들

[글로벌 리포트 | 베트남]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베트남에서 베트남어와 함께 러시아어까지 구사하면 정·관·재계 고위층과 쉽게 통한다. 권력서열 1위의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 권력서열 2위의 응우옌 쑤언 푹 총리가 이끄는 행정부의 장·차관급 이상 고위 관료 상당수가 구 소련 유학파다. ‘베트남의 삼성’ 빈그룹을 이끌고 있는 팜 녓 브엉 회장도 모스크바에서 유학 뒤 연방이던 우크라이나로 넘어가 사업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고, 동남아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저가항공 비엣젯의 응우옌 티 푸엉 타오 회장도 모스크바 유학 중에 사업구상을 했다.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베트남을 이끌고 있는 인물 80%가 러시아 유학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러시아는 베트남에 각별한 나라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했던가.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긴 뒤 의지할 데 없던, 궁핍하던 시절, 베트남은 국가 재건을 목표로 소련에 유학생들을 보냈고, 소련은 선진 문물을 익혀 가도록 했다. 1982년부터 유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소련으로 대거 보냈다. 외화 벌이, 선진 기술 습득 목적이었다. 소련은 1990년대 초 붕괴했지만, 여전히 베트남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선생님의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지난해 방영된 ‘자작나무 연가’(Birch tree love song)가 높은 인기를 끈 것은 당연하다. 1986년, 러시아 곳곳을 배경으로 베트남 유학생과 근로자들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다. 국영 TV(VTV1)가 직접 제작한 대작으로, 작년 1월부터 주 2회씩 총 36회 방영됐다. 여성들은 물론 장년 남성들 사이서도 높은 인기를 끌었다. 성공 배경은 뭐니 뭐니 해도 냉전시대 ‘선생의 나라’로 부르던 소련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각별한 감정이다.


베트남에서 러시아 문화는 고급한 문화다. 곤궁한 유학생활을 달래주던 보드카가 고급 주류로 대우 받고 있고, 당시 듣던 음악은 최고급 예술로 자리를 잡았다. 소련이 붕괴한 지 30년이 다 돼 가지만 당시 엘리트들이 가져온 러시아 문화는 후세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통해서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K팝 등 한국의 대중문화가 베트남에서 인기라고 한국 매체들이 보도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유료 K팝 콘서트가 베트남에서 성공했다는 예를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공연은 모두 무료다. 베트남에서 K팝은 돈 내고 즐기는 문화가 아니다. 한국 아이돌에 열광하는 팬층 대부분이 구매력이 없거나 취약한 10~20대다. 그 이상 연령층, 부모 세대에서는 의미를 찾기 힘들다. 베트남 부모들은 아이들이 러시아 클래식 음악회에 가는 것을 장려하면서도 K팝 공연장에 간다고 하면 달가워하지 않는다. 베트남의 유명한 음악감독 꾸옥 쩡은 K팝이 베트남의 문화 수준을 끌어내린다며 가슴을 쳤을 정도다.


한류가 고급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보급 주체에 대한 분석이 설득력 있다. 러시아, 일본, 중국 문화는 베트남의 정치인, 전문가, 종교인 등 사회 지도층이 가져와 보급하면서 상류층이 소비하는 고급 문화로 안착했지만, 한국의 경우 사회적 영향력이 약한 층이 주로 소비하는 대중문화라는 것이다. 한류가 상류층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한류에 대한 반감도 거론된다. 영화계의 경우 베트남 내 스크린을 장악한 한국 업체들이 베트남의 전통 문화 계승에 필요한 영화 상영에는 인색하게 굴자 한국을 향해 ‘문화적 습격’, ‘침략’ 같은 과격한 단어까지 동원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불거진 국내 아이돌 그룹 멤버의 충격적 일탈은 한류 확산에 찬물을 끼얹고, 박항서 감독이 쌓아 올린 한국 이미지를 다 깎아먹는다는 우려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베트남은 SNS와 일부 온라인뉴스를 제외하면 예상했던 것보다 조용하다. ‘악플’보다는 ‘무플’에 가까운 수준이다. 한류 ‘열풍(烈風)’이라는 표현이 과장됐거나, 한류 이면의 어두운 면이 그들에게 더 이상 새롭지 않아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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