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35년 만화에 담아…목숨 던진 '무명의 독립운동가' 기억하길"

[밖에선 본 기자 밖에서 본 언론](12) 박시백 화백

일제강점기 역사를 다룬 시리즈 ‘35년’ 4·5권 출간을 앞둔 박시백 화백은 지난 4일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13층 기자협회 회의실에서 기자협회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강아영 기자  박시백 화백은 일제 강점 35년의 역사를 다루려 미리 예견한 듯 했다. 서른 후반에 시작해 쉰이 되어서야 완간한 대하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권(20권) ‘망국’편은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담은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독립전쟁의 길은 고문과 투옥, 총살과 교수대 그리고 가족의 고난과 곤궁이 예정된 길이었다. 그 모든 걸 감당하며 역사 앞에 이름 없이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조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

 

전작에서 예고한 후속작 ‘35년’은 일본에 강제 병합된 1910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일제강점기 35년을 담고 있다. 1~3권은 작년 초에 나왔고 1926~1935년 시기를 담은 4·5권은 5월말 또는 6월 초 출간을 앞두고 있다. 내년 8월쯤 총 7권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4·5권은 어떤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나요?

 

“4권은 조선공산당과 신간회, 민족유일당 운동이 나와요. 특히 광주학생운동은 임팩트 있게 다뤄집니다. 우리가 알았던 것보다 전국적이고 굉장히 치열했더라구요. 5권은 일제의 만주침공, 그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들의 싸움, 중국에서 김구나 김원봉 등의 움직임이 들어갑니다.”

 

-5년간 자료 수집 및 치밀한 취재를 거쳐 이 책을 집필했다면서요?

 

“아이고, 그건 출판사에서 멋있게 포장한 얘기에요. 그냥 쉬엄쉬엄.(웃음)”

 

-국내 곳곳이나 중국, 연해주 등 현장 취재는 다녀왔나요?

 

“연해주는 못 가봤고, 연변 쪽은 2번 갔는데 생각보다 별로였어요. 가령 봉오동 전투 전적지는 수몰돼 있고, 또 어떤 데 가보면 다 수수밭이고. 전반적으로 만주가 이런 환경이라는 느낌은 받았죠.”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가보셨죠?

 

“가봤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가 남아 있으면 좋은데 그게 어렵잖아요. 그 시대를 다룬 영화를 보면 좋은데. 결국은 가장 많이 활용하는 게 구글이죠.(웃음)”

 

-구글이요?

 

“가령 인물이든 당시 지명이든 사건이든 검색을 해요. 검색하다보면 뭔가 흔적들이 그나마 좀 남아 있어요.”

 

-자료조사만으로 방대한 작업이었는데.

 

“공부하는 훈련이 안 돼 있어 힘들었어요. 강준만 선생이나 진중권씨 보면 방대한 자료를 잘 활용해 쓰시잖아요.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게 없어서 그냥 읽고 줄을 긋고 했죠. 조선왕조실록은 분량이 방대하고 문장 번역이 거칠어요. 실록 자체는 재미가 없지만 제가 노트에 요약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봤어요. 작업이 편안했죠. 그런데 근현대사 기록은 동일한 사건에 대해 관점이 다양하고 해석도 다 달라요. 제 능력 밖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했죠.”

박시백 화백의 ‘35년’ 1·2·3권. 비아북 제공 ‘35년’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자료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60권을 기본 텍스트로 삼았다. 그 밖에도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들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리역사넷을 비롯한 인터넷 자료 등의 도움을 받았다.

 

-‘35년’을 쓴 목적은.

 

“두 갈래인 것 같아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투했던 우리 선조들을 우리가 잘 모르고 있어요. 그 분들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했죠. 또 하나는 그들과 정반대 편에 서서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있죠. 그들의 친일행적에 대해 잘 정리해 알려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죠.”

 

그는 ‘작가의 말’에서 소명의식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시대의 요구 앞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들, 그들의 정신, 그들의 투쟁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라를 위해 싸웠던 선열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리라.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라를 팔고 민족을 배반한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그들은 일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고 집안을 일으켰다. 나아가 해방 후에도 단죄되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뿐인가, 민족교육인이니 민족언론인이니 현대문학의 거장이니 하는 명예까지 차지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로, 친일부역자는 친일부역자로 제 위치에 자리 잡게 해야 한다.”

 

-언론 인터뷰에서 “더 많은 독립운동가와 친일부역자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책의 집필로 이끌었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 충족됐나요?

 

“부족하죠. 많은 사람을 알리고 싶은 욕심이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당위도 있는데. 독자 입장에서 등장인물이 많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어렵죠. 그렇다고 우리한테 익숙한 몇몇 사람들 위주로 가는 건 취지에서 벗어나죠.”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하면 손에 꼽을 정도인데, 책에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분들이 많이 나옵니다.

 

“역사는 지나고 나면 후대의 평가가 중심이 되죠. 사람의 행적은 무게를 저울에 달아 정확하게 잴 수가 없잖아요. 어떤 사람은 조명을 받고, 어떤 사람은 묻히기도 하죠. 숱한 이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나섰어요. 기꺼이 국경을 넘었고, 목숨까지 내던졌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죠.”

 

조선인 최초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도 그런 인물이다.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독립운동을 벌인 그녀는 1918년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가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에 체포됐다. 아무르 강변의 총살 현장에서 그녀는 열세 걸음을 걸은 다음 마지막 진술을 이렇게 했다. “지금 내가 걸은 열세 걸음은 조선의 열세 개 도입니다. 조선의 13도 젊은이들이여! 여러분 모두는 우리 후예들이 조선을 해방시키고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하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조선독립 만세! 소비에트 만세! 볼셰비키당 만세!”

 

-‘35년’은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친일부역자에게도 똑같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친일파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인가요?

 

“평가까지도 아니고 그냥 사실을 알게 해주는 정도죠. 내 책이 한 개인에 대해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수박 겉 핥기인데, 친일파 이름 석 자라도 알리는 게 의미가 있다고 봐요.”

 

-친일부역자도 나뉘는 것 같습니다. 을사5적처럼 뿌리부터 친일부역자가 있는가하면 2·8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이광수나 3·1운동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린 최린, 최남선 등은 나중에 친일의 삶을 살았습니다.

 

“최린인가요. 반민특위에서 ‘조선이 독립할 줄 알았으면 내가 그랬겠느냐’고 얘기했다죠. 최린처럼 친일파들은 일제가 망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을 했죠. 만주침공을 입안한 이시하라 간지와 같은 자들은 궁극적으로 일본이 살아남아서 미국과 일전을 벌여 세계를 지배한다는 망상을 가졌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경도된 거죠.”

 

-그렇게 보면 35년간 독립운동의 한길을 걸었던 분들은 존경스럽습니다.

 

“그럼요. 실수도 있고 분열하기도 했지만 싸우는 길을 택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여운형 선생이 일본 제국호텔에서 내외신 기자들과 지식인들 앞에서 조선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던 때가 기껏해야 30대 초반이었죠. 김규식 선생도 마찬가지고. 이동휘나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거죠. 젊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해방되는 그날까지 독립운동 대열에 뛰어들었죠. 사실 35년은 한 세대를 훌쩍 넘는 긴 세월이죠. 강제병합 이후에 태어나 일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어요. 그 시대를 살았던 선열들이 자랑스럽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4월1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3·1혁명은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각지의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조직의 필요성을 확산시켰죠. 3·1혁명 이후 변화된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한 각지의 인물들이 상하이로 모이면서 1919년 4월11일 임시정부가 출범합니다. 임시정부는 정당이나 단체, 동맹이 아닌 정부 조직 형태로 출범했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10개조의 임시헌장을 의결했죠.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통해 민주공화제를 선언했죠.”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는데, 1948년 8월15일을 건국일로 삼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친일파들에겐 독립운동의 역사 자체가 불편한 역사죠. 누군들 친일하고 싶었겠나. 먹고 살려고 한 거라는 식으로 퉁쳐 넘어가려고 하는 거잖아요. 해방 이후 독립운동의 핵심세력들이 좌파에 섰고 김구 선생 같은 우파도 북쪽과 손잡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죠. 우파들은 이승만이 그런 걸 다 물리치고 남한만의 정부를 세웠기 때문에 북한과 대비되는 지금의 남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35년’에서 이승만이 부정적으로 묘사됩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자기보다 나라와 민족을 우선한 사람들이잖아요. 때로는 이념일 수도 있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대의를 앞세웠죠. 그런데 이승만은 늘 자기를 우선시하는 행보를 보였어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총회를 분열시키고,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뽑혔는데 대통령 명함 사용을 고집하고 미주 교민들 애국성금을 임시정부와 협의없이 설립한 구미위원부에 귀속시켰죠. 하와이 법정에서 박용만 등의 항일운동을 비난하기도 했죠. 수수께끼의 인물입니다. 가급적 선입관을 배제하고 그리려 했는데 이야기 뉘앙스나 전개가 흠 잡으려하는 경향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그냥 보여줌으로써 판단하게 해야 하는데, 제가 공부하면서 와닿는 느낌이 작업할 때 작용한 것 같아요.”

 

-이승만도 1945년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지 않았나요.

 

“헌신은 아니고 나름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맞죠. 국제정세의 흐름을 잘 보고 있었고, 늘 미국 입장에서 미국이 움직일 수 있겠다고 판단할 때 움직인 것 같아요. 국제적 역학 관계에서 미국과 일본이 싸울 것 같은 분위기가 생기면 미국 입장에 서서 일본을 공격하는 그런 태도로 일관하지 않았나 싶어요. 외교론자인 이승만은 일본을 상대로 독립을 얻는 길은 미국을 상대로 외교를 잘해서만 가능하다고 봤어요. 3·1혁명 직후의 정서에는 안 맞지만 그렇게 욕먹을 일은 아니었다고 봐요. 대개 수완있는 사람은 분명한 것 같아요.”

 

-‘35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과정이 나옵니다. 조선일보는 박헌영, 김단야 등 사회주의자 청년들을 기자로 채용했더군요. 

 

"1920년대 조선일보는 사회주의 신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친사회주의 논조를 펼쳤죠.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세력을 한데 묶은 신간회 결성도 조선일보가 주도적으로 이끌었어요. 나중에 방응모가 인수하기 전까지 조선일보는 진보적인 신문이었죠.“

‘35년’ 4권에 나오는 조선과 동아의 경쟁. 박시백 제공 -당시 기자들의 생활은 어땠나요.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 남은 진보인텔리들은 직업을 원해도 갈만한 곳이 별로 없었어요.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이 중요한 직장으로 부각됐죠.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된 조선·동아일보 기자들도 많아요. 독립운동 관련 사건이 터지면 곧바로 호외를 만들어 뿌리곤 했죠. 30년대 들어 신문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비적’이라고 하잖아요. 표현은 그렇지만 우리가 70~80년대 기사의 행간에서 진실을 읽어낸 것처럼 진실을 알리는 방법이었죠.”

 

-압수와 정간을 당하면서도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다는 뜻이군요.

 

“그럼요. 윤봉길 의거나 이봉창 의거를 대서특필하고 그 외에도 중요한 사건들을 크게 다뤄요. 재판소식도 따로 다루고. 우리 민족이 여전히 계속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민중들에게 심어줬다고 생각해요. 당시 동아·조선일보는 조선민중에 대한 영향력 측면에서 일제를 제외하면 가장 큰 집단이었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쟁이 치열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량공세를 엄청 합니다. 방응모가 인수한 뒤 자금력이 풍부해진 조선일보는 비행기를 마련해 취재에 사용하고 당일 석간신문을 평양, 신의주까지 배달하기도 했죠. 동아일보는 광고주를 초청해 요정에서 접대하고 조선일보도 이를 따라하며 광고 경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엔 친일지로 변모하죠. 폐간 직전의 2~3년은 살아남기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천황폐하만세’식의 그런 보도들이 공공연하게 나왔죠.”

 

-3·1운동이 있었기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이 가능했습니다. 내년이면 창간 100주년이 되는 두 언론사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3·1운동의 수혜자들이죠. 20년대는 나름의 자기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해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처럼 보도했다면 폐간됐겠죠. 중일전쟁 이후 일제 침략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하고 영합했죠. 그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죠. 독재 정권을 거쳤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한 양 스스로를 포장하잖아요. 부끄럽던 시절에 대해선 부끄러웠다고 반성해야죠. 그래야 신뢰를 얻지 않을까요.”

 

박시백 화백은 1996년 한겨레신문에 만평가로 입사해 5년간 몸담았다. 1년은 만평을 그렸고, 이후 4년은 스토리가 있는 시사만화 ‘박시백의 그림세상’으로 시사만화가의 입지를 굳혔다. 2001년 한겨레신문을 떠난 그는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는 작업에 매진해, 12년 만인 2013년 20권을 완간했다. 이후 6년 가까이 일제강점기 역사를 다룬 ‘35년’에 전념하고 있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조선왕조실록을 한 10권쯤 썼을 때 왜 이거하나 싶었어요.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리고 독자들이 별로 알아봐주지도 않고, 여러 생각이 들었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후마니스타 제공 -한겨레를 다니며 조선왕조실록 작업도 할 수 있지 않았나요.

 

“당시 일주일에 2~3번 ‘박시백의 그림세상’을 연재했거든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까 공부하면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근데, 그게 안돼요. 한두 달 시도해보다가 어영부영 아무 것도 안될 것 같아 나왔어요.”

 

-밥벌이는 해야 하지 않았나요?

 

“그때는 조선왕조실록이 바로 대박날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환상에 빠져가지고, 빨리 안하면 다른 친구가 해버리겠다 싶어 일단 회사부터 그만두자고 했죠.”

 

-무모하셨군요.

 

“출판사와 계약한 상태도 아니었고, 실록을 공부한 적도 없는 상태에서 관뒀죠. 진짜 무대포로 나왔어요. 관련 책을 보고, 궁궐을 찾아 사진을 찍고, 조선왕조실록 CD를 공부하면서 데모판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신문연재로 생각해 두세 곳 신문사와 접촉했거든요. 될듯하다가 고료 문제로 안됐어요. 그러다 출판사와 연결됐고 계약하기까지 1년 반이 걸렸죠.”

 

-생계는 어떻게 했나요.

 

“출판사에서 선인세 개념으로 다달이 얼마씩 줬고, 회사 관두고 나오니까 아내도 집에 있다가 깜짝 놀라서 열심히 공부하더니 임용고시 시험에 합격했어요. 내 덕에 선생이 된 거죠(웃음)."

 

박 화백은 어릴 때부터 만화가를 꿈꿨다. 만화책 보기 힘든 두메산골 시골에서 자랐지만 어쩌다 동네에 만화책이 들어오면 돌고 돌아 자신에게 왔다. 한겨레 만평으로 데뷔해 늦깎이로 시작한 만화가의 길은 ‘조선왕조실록’과 ‘35년’을 거치면서 되돌릴 수 없게 됐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딱히 뭘 할지 정하지 않았어요. 주변에서 현대사를 해보라는 요구가 있는데, 한심한 기억력과 부족한 공부 능력을 감안하면 쉽지 않겠다 싶어요. 그동안 독자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어요. 그런 만큼 늘 고맙게 생각하고 열심히 그리는 것 자체가 독자에 대한 보답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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