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에 관대한 편이다. 급한 성격 탓이다. 소설을 읽을 때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면 마지막장을 확인한다. 결론을 알고 읽는 소설이야말로 정말 재미있다. 예상했던 결말이라면 스스로에게 감탄하고, 그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이 결말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으로 책을 밀고 나간다. 서효인 시인 역시 나와 비슷한 독서관을 갖고 있어서 반가웠다. “나는 소설에서 깜짝 놀랄 만한 반전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결말을 향하는 플롯의 걸음을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 가고>, 2018)
영화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결말을 알고보든, 모르고보든 영화에 대한 흥미나 평가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책이나 영화가 내 몸을 통과하며 남기는 흔적은 타인의 평가와 무관하게 온전히 ‘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11년 역사를 갈무리하는 <어벤저스:엔드게임>을 둘러싼 스포일러라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으려 애쓰고, 조심하고, 안달하며 ‘함께’ 부산을 떠는 묘미야말로 영화 밖에서 영화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스포 당할 수도 있으니까 극장에서 화장실 갈 때도 꼭 이어폰 끼고 가” 같은 친구의 조언이나 “스포 말한 애인과 헤어지려 한다”라는 내용의 글에 달린 수백 개의 댓글이야말로 이 시리즈를 완성하는 하나의 ‘풍경’인 셈이다.
나 역시 개봉 첫 주 주말 새벽 1시40분에 피곤한 몸을 극장에 구겨 넣었다. 그 시간에도 빈자리가 드물었다. 영화에 대한 기대보다는 ‘스포일러 당하지 않고 영화 보기’라는 ‘놀이’에 참여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물론 영화를 함께 본 짝꿍은 달랐다. 그는 마블 시리즈의 11년 역사와 자신이 지나온 11년 세월을 겹쳐 보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한 시절이 저문다는 걸 절절하게 아쉬워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마블 시리즈가 개봉할 때마다 반복되는 스크린독점에 분노하며 외롭게 ‘셀프 불매’를 하던 내가 이 단순한 영웅물을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된 것도 일정 부분 짝꿍 덕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마블 시리즈를 사랑하게 될 게 분명하다. 이번 영화에서 마블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백인에서 흑인으로 권력 이동을 예고했다. “능력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지난 3월 개봉한 MCU 최초 여성 단독 주연 영화 <캡틴 마블>의 대사다) 이 새로운 영웅들이 특히 아이와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을 상상하면 정말 짜릿하다.
자, 이렇게 결국 스포일러를 이야기하고 말았다. 스포일러 없이 영화 이야기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영화를 아직 안 본 관객에게 팁을 하나 주자면 상영시간은 181분이고 당연히 인터미션은 없다. 제발 화장실을 미리 다녀와서 ‘관크’(관람 방해)의 주인공이 되지 말자. 정말 못 참겠다면 ‘TOKYO’ 자막이 뜰 때가 기회다. 이 부분은 정말이지 영화에 굳이 필요 없는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