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이민자들

[글로벌 리포트 | 캐나다] 김희원 한국일보 부장

김희원 한국일보 부장. “한국에서 행사무대 디자인을 했어요. 시장이 큰 건 아니지만, 그 분야에선 큰 회사였어요. 그 경력을 살려서 여기서 취직을 하려고요. 와보니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는 않네요. 캐나다에 왜 왔냐고요?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여자에 대한 장벽도 많고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캐나다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하잖아요.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이었고, 취직 해서 눌러 살 생각이에요.”


30대 초반의 A씨를 밴쿠버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런가보다 했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마지막 기회’였던 이민의 개념이, 이제는 취업난, 장시간 노동, 갑질 등이 만연한 ‘헬조선 탈출’로 변화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남의 나라에 적응하는 게 지금이라고 쉽지는 않은 일. 여전히 궁지에 몰린 이들의 선택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A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다 나은 삶을 찾아 해외로 터전을 옮기려는 이들이 내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것을 알았다.


1년여 전 초등 3학년 아이의 학생비자를 받아 함께 캐나다에 온 주부 B씨의 경우는 더 잃을 것이 많아 보였다. B씨의 남편은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IT 관련 업체에서 보안 전문가로 일한다. 월급도 남부럽지 않은 정도다. 그러나 B씨는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는 캐나다에 온 뒤 부지런히 영주권 취득 방법을 알아보았고, 나름의 계획을 세워둔 상태다. 함께 온 동생은 이미 절차가 진행 중이다. B씨는 영주권을 취득하고 나서 남편을 불러올 계획이다.


“끔찍한 한국 교육환경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어요. 공부를 좋아하는 애도 아닌데요. 남편도 지금은 괜찮지만 IT쪽은 생명이 길지 않아서요, 팀장 이상 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경쟁이 치열한 교육환경 외에 심각한 미세먼지도 B씨가 아이를 캐나다로 데려온 이유 중 하나였다. B씨 부부는 “아이가 운동장에서 마음 놓고 뛰어놀지도 못하는 이런 나라에선 못 살겠다”고 마음 먹었다.


미세먼지 때문에 캐나다로 오는 이들도 꽤 만났다. 30대 초반 웹디자이너 C씨가 그랬다. “몸이 건강하지 않은 편이거든요. 예전에 아일랜드에 1년 살았었는데 그 때는 상태가 좋았어요. 한국에 가니까 또 안 좋아졌고요. 대기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언니와 함께 캐나다로 왔어요. 취업해서 정착하면 남동생네 아이가 있는데 조카를 불러서 여기서 유학시킬 생각이에요.”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이 지난 1월 전국 19~5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7.7%가 구체적으로, 65.6%가 막연하게나마 이민을 고려했다.


이민가고 싶은 나라로 첫손 꼽힌 게 캐나다(55.1%ㆍ중복응답)였다. 이 설문조사가 무슨 뜻인지 캐나다에서 생생히 실감한다. 취업도 어렵고, 어렵사리 취업을 해도 늘 쪼들리고 전전긍긍하는 삶이 지긋지긋한 이들,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경쟁적이지 않은 학교에서 아이를 키우며 청정한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는 삶을 찾는 이들을 캐나다에서 어렵지 않게 만났다. 위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이 이민을 고려한 주요한 이유는 여유로운 삶을 찾아(39.2%), 한국사회의 경쟁구조에서 벗어나려고(33.6%), 빈부격차와 소득불평등이 싫어서(32.1%·이상 중복응답)였다.


21세기 청장년들에게 조국이란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이 아니다. 선택할 수있는 삶의 조건이고, 많은 이들이 선택을 감행한다. 궁지에 몰려서야 이민을 할 것이라는 짐작은 내 착각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과연 선택받을 만한 나라인가. 저런 구조적 문제가 완화되지 않을 때 미래 세대는 존속할까. 밖에서 직시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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