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가 붉게 달아올랐다. 계절은 5월로 들어섰지만 더 붉게 타오르고 있다. EBS 인사를 두고 벌어지는 내홍 탓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불길이 번진 지도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청원의 내용은 EBS 부사장 임명 철회다. 청원인은 EBS 전 피디였던 김진혁씨다. 7일 현재, 청원에 2만5000명이 동참했다. 김진혁씨는 2013년 반민특위 다큐멘터리인 ‘나는 독립유공자 후손입니다’를 만들던 중, 부당인사로 제작이 중단됐다고 주장했다. 당시 제작 중단에 책임이 있는 박치형씨가 부사장으로 임명된 것은 문제가 있고, 임명을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 청원의 핵심이다.
당시 언론계에선 EBS 사장이 박근혜 정부로 정권이 바뀐 뒤 눈도장을 받기 위해 역사 다큐를 무력화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항일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인 군인이었는데, 반민특위를 정면으로 다룬 다큐가 눈엣가시였음은 불문가지다. EBS 내부에서도 “박근혜 정권 홍보 부역자가 부활했다”며 부사장 임명에 반발하고 있다. 노조를 중심으로 비판이 거세자, 김명중 사장이 노사 잠정합의안을 마련해 사태가 해결되는 듯했지만 다시 꼬이며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잠정합의안은 노사가 동수로 다큐 제작 중단에 대한 진상조사를 진행해 각각 결과를 발표하고, 박 부사장 신임 투표를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풀릴 듯 했던 사태는 사장이 돌연 특별감사를 청구하며 신임 투표 약속을 없던 일로 뒤집어버렸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사장과 상임감사를 임명해 한 식구나 다름없는데, 사장이 부사장을 비호하는 분위기에서 제대로 감사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노조는 반발하고 있다. ‘면책용 물타기 감사’가 될 것이 뻔하다는 이야기다. 애초 합의안대로 진행해서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는 것이 누가 봐도 합리적일 텐데, 돌연 뒤통수치는 행태는 그 의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실 이번 사태는 사장 임명과정부터 예고돼 있었다. 직원들은 물론 언론단체에서 사장을 공개 모집하고 국민참여-공개검증 방식으로 사장을 뽑자는 요구가 컸다. 지금처럼 방통위가 자기 식구였던 퇴직 관료를 사장으로 임명하는 방식으론 방송의 독립성을 지켜내기 어렵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다. 방통위가 경영진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공개 모집 방식으로 사장을 뽑는 게 더 효율적인데도 권한을 내려놓는 걸 한사코 거부했다. 문제의 근원이 방통위에 있음은 명확하다.
공영방송의 책임자는 방송 독립에 대한 의지가 특히 요구된다. 제작의 자율성을 수호하고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방송의 공정성을 지켜내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내부에서 그 자질을 의심하는 인물을 강행하는 인사는 철회해야 마땅하다. 직원들이 수용하지 못하는 인물로 조직을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김명중 사장도 노사 잠정합의안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큐 제작 중단의 진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는 내부 화합을 이룰 수 없다. 이해득실을 따져 결정할 때가 아니다. 정도를 걷는 것만이 어려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꼬인 실타래의 원인이 박 부사장에게 있고 본인도 억울해하는 부분이 있으니 임명 철회와 무관하게 진상조사는 더더욱 필요하다. 특별감사를 고집하는 것은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내부 진상조사가 어렵다면, 외부의 믿을만한 인사들로 진상조사위를 꾸리는 것도 방법이다.
EBS는 정답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문제가 꼬였을 때 지혜롭게 푸는 방법을 제시하는 곳이다. 갈등의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풀 방도를 찾아 해법을 마련하는 것이 수순이다. EBS가 이번 사태에 대처하는 자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