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서설묘(窮鼠齧猫)

[글로벌 리포트 | 중국] 이재호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이재호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예상 밖 전개다. 일단 봉합될 것 같던 미·중 갈등, 휴전이 임박해 보였던 무역전쟁이 다시금 격화하고 있다. 양측이 무역협상 합의 무산을 놓고 네 탓 공방 중이지만, 본질은 ‘궁서설묘(窮鼠齧猫)’ 즉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 것이다. 애초에 중국 수뇌부는 미국과 본격적으로 맞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중국은 과거부터 외부 환경의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것을 싫어했다.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탓이다. 특히 1980년대부터 지속돼 온 고도 성장기가 끝나고 빈부 격차 등 내부 모순이 표면화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중국 경제의 경착륙 우려가 팽배한 상황에서 무역전쟁이 길어지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초 개헌을 통해 자신의 임기 제한을 없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나 장기 집권을 꿈꿨던 위정자 가운데 상당수가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천착했다. 집권의 정당성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도발로 시작된 무역전쟁이지만 중국은 적당한 선에서 양보할 수 있다는 속내를 끊임없이 드러냈다. 미국산 항공기와 자동차를 더 사주고, 미국 금융회사가 중국 시장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고, 중국 기업이 남의 기술을 도용하는 것도 막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합의 문건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사달이 났다.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법을 바꾸고, 합의 이행 여부에 대한 정기 점검까지 받도록 중국을 압박한 것이다. 너무 굴욕적이다. 주권 침해다. 중국 수뇌부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올해는 신중국 수립 70주년이다. 내년은 전면적 샤오캉(小康·중산층) 사회 건설을 약속한 해다. 2021년은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고, 2022년에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중국의 최종 목표인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향하는 노정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시기에 미국에 너무 굴종적인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체제 동요가 심각해질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뉴욕 부동산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애용해 온 협상 기술 ‘극한 압박’으로 중국의 항복을 받아 낼 심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은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명분을 위해 실리를 포기할 수 있는 정치꾼이다. 중국 공산당은 집권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이 따르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조직이다. 중국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다. 활로를 터주지 않고 몰아부치던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 착오다.


중국 관영 언론들은 ‘군자의 나라는 먼저 예를 다하되 통하지 않으면 싸운다(君子之國 先禮後兵)’고 점잖게 위협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이어 나온 표현이 심상치 않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미국은 중국이 스스로 발전할 권리를 지켜낼 능력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고 지적한 뒤 청나라 말기 소설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의 한 구절을 인용해 “먼저 경고한 적 없다고 말하지 말라(勿謂言之不預也)”고 일갈했다.


중국 최대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로 검색해보니 ‘중국이 개전(開戰)을 준비하는 신호’라고 설명한다. 1962년과 1978년 인민일보가 이 표현을 쓴 뒤 각각 인도·베트남과의 전쟁이 시작됐고, 1967년 신화통신 보도 이후에는 중·소 분쟁이 본격화했다. 바이두에는 지난달 29일 인민일보 보도 내용이 네 번째 용례로 표기돼 있다.


중국의 대미 보복 카드로 언급되는 희토류 수출 제한과 미국 기업 제재 등의 현실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미국도 그동안 관세를 안 매기던 30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조만간 추가 관세를 부과할 태세다. 한국 등 국제 사회는 미·중 간 극한 대립이 진영논리나 편가르기로 번질까 불안해 하고 있다.


‘궁서설묘’의 유래를 아는지. 중국 전한 소제 때 소금·철 전매제에 반대하던 유학자들은 ‘궁지에 몰린 쥐는 삵을 물고, 평범한 사람도 천자를 칠 수 있다’며 백성을 핍박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설움을 겪으면서도 떨쳐 일어나 물 힘이 없는 우리 처지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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