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없는 야구

[스페셜리스트 | 스포츠] 양지혜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양지혜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일본과 친하게 지냄.’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한 친일(親日)이다. 작년 일본에 간 한국인이 약 754만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찍은걸 보면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이 꽤 많을텐데, 뉴스엔 반일(反日)이 절정이다. 수십년 불러온 교가와 동네 이름, 도로명 등이 하루아침에 친일 낙인으로 사라질 처지라고 한다. 경기도 학교에선 일본산 비품에 ‘전범(戰犯) 기업이 만든 제품’이라는 스티커가 붙을 뻔했다. 최근엔 동요 ‘우리집에 왜 왔니’가 일제강점기 위안부 인신매매와 연관있으니 금지해야한다는 학계 뉴스가 나왔다.


이런 논리라면 연간 관중 800만명이 찾는 프로야구도 살아남기 어렵다. 최고 인기 스포츠로 군림하는 한국 프로야구엔 일본의 흔적이 지금도 흥건하다. 용어부터 그렇다. 미국의 ‘Baseball’을  일본인 주만 가나에(中馬庚)가 야큐(野球)로 번역했다. 그가 보기에 이 스포츠는 단순히 루(壘·base) 사이를 오가는 행위가 아닌, 들판에서 벌이는 전쟁이었다.


그는 공을 가장 많이 처리하는 ‘Shortstop’이 내야를 누비는 군대 유격대같다는 의미에서 유격수(遊擊手)로 번역했다. 전쟁이기 때문에 주루사(死), 보살(殺), 도루자(刺) 등 죽음의 그림자가 짙은 용어들이 숱하다. 내야와 외야의 구분, 좌익-중견-우익으로 나뉘는 수비, 안타·적시타·도루·송구·주자 등 용어 대부분이 일본식을 따랐다.


어찌됐든 우리는 ‘야큐’를 그대로 삼켜서 우리식 ‘야구’로 잘 소화시켰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일본을 준결승에서 꺾고 금메달을 땄다. 19세기 말부터 야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류현진은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잘 던지는 투수다.


한일 관계가 갈수록 경색된다지만 야구는 예외다. 일본 오키나와는 국내 프로야구 구단들이 매년 가는 스프링캠프 장소다. 일본인 코치도 친숙하다. 올 시즌 한화는 다나베 노리오 전 일본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을 타격코치로 임명했고, 삼성의 오치아이 에이지 투수코치는 2010년대 ‘삼성 왕조’ 시절의 조연이었다. 쇼다 코우조 KIA 타격코치는 벌써 한국생활 10년이다. 이런 코치들을 영입한 구단에 “친일파”라고 지적하는 야구 팬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본 제국주의가 과거 이 땅에서 저질렀던 전쟁 범죄와 만행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는 이런 비극을 겪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무작정 ‘친일’ 낙인을 찍고 손가락질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야구엔 이분법적 이념 대립이 없다. 투수의 평균자책점과 타자의 타율처럼 숫자로 치환된 객관적인 기록만 있다. 노모 히데오의 메이저리그 123승, 그걸 넘어선 박찬호의 124승 기록 모두 박수받는 것처럼 한국과 일본이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서로 발전하는 친구가 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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