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읽은 디즈니 실사 영화 '알라딘'

[스페셜리스트 | 문화] 장일호 시사IN 기자

장일호 시사IN 기자. 아동복을 파는 백화점 매장 안에는 ‘어린이용’ 화장대가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여덟 살 아이가 관심을 보이자 직원은 무해한 성분을 강조하며 발라보라고 권유했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디자인의 옷을 애써 고르고 있던 나는 벌컥 화를 낼 뻔했다. 어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어린이집과 학교를 거치며 성역할을 빠르게 사회화했다. ‘빌어먹을 핑크’와 조악한 레이스는 거스를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조카가 둘 있다. 모두 여자 아이다. 집안에서 아무리 애써도 집밖에서는 무용할 때가 많았다. 성별 고정관념과 그것이 수반하는 문제를 일일이 따져 묻고 설명하기보다 체념하는 쪽이 빨랐다. 성장과정에서 스스로 깨닫는 행운을 아이들이 만날 수 있기를, 그때 적절히 조력해줄 수 있는 어른으로 곁에 남아있기를 기대하며 훗날을 기약하게 된다. 내가 그렇게 성장했듯 말이다.


나는 1993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을 마르고 닳도록 보고 자란 사람 중 한 명이다. 애니메이션 속 쟈스민은 궁 밖에 나가본 적 없는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님이었다. 쟈스민의 목표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다. 자파가 술탄 자리를 차지하기 직전의 위기 상황에서 쟈스민은 알라딘을 돕기 위해 자기 몸을 도구 삼아 자파와 원하지 않는 키스를 한다. 결국 모래시계 안에 갇혀 타인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전형적인 ‘공주님’ 역할에 머문다. 그때 나를 비롯한 여자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모험은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동화는 시대에 맞춰 다시 쓰여야 한다. 영리한 디즈니는 이 새로운 ‘시장’을 잘 알고 있다. 2019년 실사 영화로 제작된 <알라딘>은 그 훌륭한 예다. 쟈스민은 공주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술탄이 된다. 왕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공부를 열심히 해 왔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술탄이 될 수 없다는 데 저항한다. 2019 <알라딘>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쟈스민의 질문에 대한 알라딘의 대답이었다. 쟈스민은 알라딘에게 ‘내가 술탄이 되어도 잘 할 수 있을지’ 묻는다. 알라딘은 답한다. “내 생각이 중요한가요?” 쟈스민이 무엇이 되든, 존재에 대한 타인의 허락이나 승인을 구할 필요는 없다. 그동안 동화 속 수많은 ‘왕자님’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알라딘> 실사판의 새 넘버 ‘Speechless’는 ‘A Whole New World’ 만큼의 고전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나를 족쇄처럼 옭아매는 수 세기 변치 않는 법과 규칙들/ ‘조용히 화초처럼 자리를 지켜라’/ 이젠 참을 수 없어/ (중략)/ 나는 절대로 침묵하지 않을 거야.” 몇 번이고 OST를 돌려 듣는다. 이 노래를 내가 들을 수 있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어서 기쁘다. 15년 뒤 <알라딘>은 또 어떤 내용으로 시대의 진보를 증명할까. 그때는 알라딘이 여성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여성 알라딘’이 지니에게 빌 세 가지 소원은 아마 또 다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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