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좀 모시고 살면 안 됩니까

[스페셜리스트 | 법조] 백인성 머니투데이 기자

백인성 머니투데이 기자. 검찰 내부에서 차기 검찰총장 지명은 용기있는 퇴진, 이른바 ‘용퇴(勇退)’의 신호탄으로 불린다. 검찰에선 자신의 사법연수원 동기나 후배가 자신의 윗자리를 차지하거나 총장에 임명될 경우 스스로 조직에서 나가는 관행이 있다. 언론과 검찰 내부에선 이를 ‘용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왔다. 용퇴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조금도 꺼리지 아니하고 용기 있게 물러남 △후진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스스로 관직 따위에서 물러남. 검사들이 받아들이는 용퇴의 의미는 후자다.


용퇴 관행은 뿌리가 깊다. 오는 7월 24일 임기만료로 퇴임을 앞둔 문무일 검찰총장(사법연수원 18기)이 지난 2017년 총장 후보자로 지명됐을 때만 해도 그랬다. 청와대가 문무일 당시 부산고검장을 지명한 지 사흘 만에 바로 윗 기수(17기)인 박성재 서울고검장과 김희관 법무연수원장이 사의를 표명했고, 문 총장의 동기(18기)였던 오세인 광주고검장 등이 줄줄이 자리를 내놨다. 전임, 전임의 전임 총장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용퇴 관행은 인사적체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불렸다. ‘통 크게’ 물러난 선배를 대접해주는 전관예우를 암묵적으로 기대할 수 있어서 유지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사 때마다 승진하는 동기나 후배를 위해 옷을 벗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검찰 조직은 조로(早老)했다. 현재 각 지방검찰청 수장들은 그 지역의 지방법원장에 비해 법조경력 연차가 평균적으로 5~6년 어리다.


법조계에서 용퇴는 오로지 검찰에만 남아있다. 사법부에도 과거 비슷한 관행이 있었지만 사라졌다. 법원에선 지금은 폐지된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을 두고 승진이 어렵다고 판단되거나, 승진에 실패할 경우 판사들이 옷을 벗었다. 후배 판사가 대법관에 지명될 경우 사표를 내는 것도 검찰과 유사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수나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원로 법관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임까지 판사로 재판을 하다 나가는 문화가 점차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검찰의 용퇴 관행이 흔들릴 기미가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중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사법연수원 23기)을 차기 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하면서다. 현직 총장인 문무일 총장보다 차기 총장 후보자가 무려 5기수 아래인 파격 인선이다. 자연히 현직 총장과 총장 후보자 사이의 선배 및 동료 기수도 많다. 이미 봉욱 전 대검 차장(19기)·김호철 대구고검장(20기)·송인택 울산지검장(21기)이 사퇴의사를 표명하거나 사퇴했지만, 이들 말고도 ‘낀 세대’는 30명에 이른다. 대상자가 너무 많다 보니, 용퇴 관행이 바람직한 것인지 비로소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검찰총장과 동기 또는 선배 기수라는 이유만으로, 20년간 수사 실력을 갈고 닦은 인력이 자의와 상관없이 공공부문을 등지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검사이기 이전에 국가의 녹을 받았던 사회의 공복이라는 점을 잊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총장과 다른 의견을 피력할 원로도 필요하다. 윤 후보자 역시 직접 최고 선배인 황철규 부산고검장과 조은석 법무연수원장까지 조직에 남아 있어 달라며 선배들의 사퇴를 적극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용퇴라는 관행, 그만둘 때도 됐다. 후배가 선배를 추월해 발탁 승진되는 일은 일반 기업에선 비일비재하다. 후배 좀 ‘모시고’ 살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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