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글로벌 리포트 | 중국] 이재호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이재호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1949년 10월14일 국민당군을 몰아내고 중국 남부 최대 도시인 광저우를 점령한 공산당은 여세를 몰아 홍콩까지 탈환하려 했다. 100여 년 전 영국에 강제로 할양된 ‘아픈 손가락’을 되찾아 올 절호의 기회였다.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5병단이 홍콩 접경까지 진출해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진입 명령은 끝내 하달되지 않았다.


중·소 관계 악화가 발목을 잡았다. 소련과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홍콩을 무력 침공해 영국 등 서방 세계까지 적으로 돌릴 경우 외교적으로 고립된 국제 미아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중국의 일부가 될 위기를 넘긴 홍콩은 아시아 최대 무역항이자 금융 허브로 성장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최근 홍콩을 가득 메운 반중 시위대를 본다면 70년 전 당시의 선택을 후회할 지도 모르겠다.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에 반대하는 홍콩 시위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지난 6월9일 처음으로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이후 크고 작은 시위가 석 달째 이어지고 있다. 2014년 홍콩 행정 수반인 행정장관 선거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작된 79일간의 민주화 시위, 이른바 ‘우산혁명’ 이상으로 지속될 공산이 크다. 중국 중앙정부의 대응도 점차 신경질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중국 국무원 산하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의 장샤오밍(張曉明) 주임은 1997년 홍콩이 반환된 이후 가장 심각한 국면이라고 자인하며 “송환법 반대 사건이 변질돼 ‘색깔혁명’의 특징을 띠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콩 시위 사태를 2000년대 초반 구(舊)소련 국가에서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일어난 일련의 민주주의 개혁 운동과 유사하다고 판단할 정도로 위기감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중국 중앙정부의 홍콩 주재 연락판공실 왕즈민(王志民) 주임은 홍콩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라고 규정하며 “더 물러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시위는 송환법을 악용해 홍콩 내 반중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탄압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시작됐지만, 더욱 본질적인 배경은 중국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뿌리 깊은 불신이다. 중국의 간섭으로 홍콩의 자유와 민주 체제가 흔들리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이 송환법 추진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많은 홍콩 시민들이 영국 식민 시기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고 시위 현장에 미국 성조기까지 등장하자 중국은 당혹감을 넘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잃은 걸 최대의 치욕으로 여기는 중국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이다. 서구와 다른 체제로 서구를 뛰어넘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며 중화 민족의 부흥을 이뤘다는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다.


올해 신중국 7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려던 공산당 수뇌부는 미·중 무역전쟁으로 악전고투를 벌이는 와중에 홍콩 시위 사태라는 암초까지 만났다. 미국 등 서구 사회가 중국을 비판할 또 다른 빌미가 됐다. 홍콩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분개하는 중국인이 많다.


중국은 군 투입 가능성까지 제기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는 중이다. 현실화 여부와 별개로 이 소식을 접한 홍콩 시민들은 30년 전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올해로 30주년이 된 천안문 사건은 홍콩에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1989년 천안문 사건은 중국과 영국이 홍콩 반환에 합의한 뒤 발생했다. 젊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총과 탱크로 유혈 진압하는 장면을 목도하며 홍콩은 중국 공산당의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수십만명의 홍콩 시민이 중국의 민주화 열기를 지지하는 집회에 나선 이유다.


이후의 상황은 홍콩 시민들이 걱정한 대로 흘러갔다. 홍콩의 정치·경제·법 체계를 보장한다는 일국양제 원칙은 갈수록 누더기가 되고 있다. 홍콩은 홍콩인이 통치한다는 ‘항인치항(港人治港)’은 친중 세력의 집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표현으로 전락했다. 특히 시진핑(習近平) 체제 들어 홍콩에 중국식 제도와 정책을 주입하려는 시도가 더욱 노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게 홍콩 시민들의 판단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일국양제의 개념을 처음 제시하며 50년 동안 유지하겠다고 공언했다. 중국과 홍콩의 불편한 동거는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22년. 한 세대가 더 흘러 일국양제의 유효기간이 다할 때쯤이면 두 지역 간 감정의 골이 조금이나마 메워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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