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위안부 동상

[언론 다시보기] 구정은 경향신문 선임기자

구정은 경향신문 선임기자. ‘필리핀 위안부’. 마닐라 록사스 거리의 베이워크에 전시됐던 동상이다. 2017년 12월8일 필리핀국가역사위원회(NHCP)와 시민단체들의 지원 속에 만들어졌다. 우리의 ‘평화의 소녀상’처럼, 이 동상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성노예로 강제동원됐던 여성들을 기억하고 전쟁범죄를 되새기기 위해 세워졌다. 호나스 로세스라는 조각가가 만든 2m 높이의 동상은 필리핀 여성들이 많이 입는 ‘마리아 클라라 드레스’ 차림에, 베일을 쓰고 눈을 가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작가의 설명을 빌리면 여성의 눈을 가린 것은 “일본 정부로부터 만족할만한 공식 사과나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고통받고 있는 생존자들의 정의를 향한 열망”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몇 달 지나지 않은 2018년 4월27일에 동상은 사라졌다. 로세스는 “일본이나 필리핀 정부에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가 역사를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지만 필리핀 정부와 일본의 반대가 극심했다고 한다. 현지언론 인콰이어러 등에 따르면 동상이 세워지자마자 필리핀 외교부는 위안부 문제가 “국내에서나 일본과의 관계에서나 매우 민감한 이슈”라며 마닐라 시 당국에 ‘설명’을 요구했다. 노다 세이코 당시 일본 총무장관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에게 ‘당혹감’을 전달했다. 얼마 안 가 동상은 거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2018년 12월28일, 마닐라 외곽의 산페드로시티에 있는 성모마리아 노인·빈민보호소 마당에 위안부 소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서경·김은성 조각가가 만든 ‘평화의 소녀상’이었다. 동상이 사라지는 데에 이틀 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역매체 라구나나우에 따르면 12월30일 시 직원들이 와서 제막식까지 했던 소녀상을, 시 직원들이 와서 치웠다. 이번에도 일본의 로비가 통했다.


전시 일본군의 여성대상 범죄를 기록해온 시민단체 릴라필리피나는 “2차 대전 때 일본군이 동원한 성노예 4만명 중에는 필리핀 여성 1000명도 있었다”면서 시 당국의 행태를 비판했지만 소용 없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이렇게 전쟁의 피해자들은 위안부상을 세우고, 일본은 돈을 무기로 위안부상을 없앤다. ‘글랜데일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될 때 연대해준 미국인들처럼, 마닐라의 필리핀 위안부 동상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가 연대했더라면 어땠을까.


일본이 아무리 방해를 해도, 날아오른 나비의 날갯짓을 멈추진 못한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작은 동상들이 세계에 일본군 전시 성범죄의 실상을 알렸다. 마침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억하는 마스코트도 노란 나비다. 일본 정부가 막는 소녀상을 일본인들이 미니어처로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세계의 시민들이 손을 잡는다. 마닐라의 거리에서 쫓겨나 로세스의 작업실에 갇힌 필리핀의 위안부 상에 뒤늦게나마 연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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