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이용마 기자를 보내며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지난 23일,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인데 햇볕은 뜨거웠다. 아름드리나무를 찾기 힘든 삭막한 상암동 MBC 앞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뙤약볕 아래 선 사람들의 등줄기를 타고 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용마 기자의 장례식이었다.


고인은 2012년 전국언론노조 MBC본부의 170일 파업 당시, 홍보국장으로 파업을 이끌었다. 2009년엔 미국산 쇠고기 관련 보도를 이유로 검찰이 PD수첩 제작진을 체포하는 초유의 사건이 있었고 2010년엔 사장이 직원들에게 MBC의 미래를 부탁한다며 임기를 못 채우고 물러났다.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이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김재철 사장이 임명된 뒤 이해할 수 없는 인사 운영과 노골적인 보도 개입으로 시한폭탄 같던 MBC에선 누가 선뜻 노동조합 전임자를 하겠다, 나서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때 손을 든 사람 중 하나가 이용마 기자였다.


170일 파업 이후 MBC엔 더 가혹한 시간이 이어졌다. 이용마 기자를 포함한 6명이 파업 중 해고됐고 김재철 사장 퇴진을 약속했던 박근혜 당시 여당 대선 후보는 말을 뒤집었다. 김재철 사장과 제2, 제3의 김재철 사장들이 자리를 지키는 사이 입바른 소리를 하다 현업에서 ‘치워지는’ 직원들이 늘어났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잘 몰랐던 건 아닐까, 견고한 기득권의 벽 앞에서 ‘언론자유’와 ‘약자 대변’은 낭만이었군, 패배주의가 감돌았다. 그래도 이용마 기자는 “공정보도를 요구한 싸움이 정당했다고 역사가 말해줄 것”이라며 불법 파업이 아님을 증명하려 동분서주했다. 그러던 2016년 가을, 암 판정 소식이 들려왔다. 희귀병인 ‘복막암’인데 심지어 말기. 장기 사이사이에 있는 복막에 걸쳐 암세포가 자라 수술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동료들은 “혹시 화병이 아닐까.” 서글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용마 기자는 생의 의지를 불태웠고 동시에 죽음을 준비했다. 유언을 쓰는 심정으로 아이들에게 줄 책도 집필했다. 죽음을 맞이한 뒤에도 아빠의 생각을 알려주고 싶어 쓴 책이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이다. 고인은 “아이들이 꿈을 갖고, 즐기는 일을 하면서도 존중받는 사회에서 살면 좋겠다. 이런 사회를 만드는 게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당시 9살이던 쌍둥이들은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됐다. 어린아이들 두고 눈감을 걱정에 세상을 원망하기보단 미래세대를 위한 언론인의 사명을 생각했다.    


2017년 12월, 한 번도 복직을 의심한 적 없다는 이용마 기자는 해직 5년 9개월 만에 정말 ‘꿈에 그리던’ 복직을 했다. 그리고 상암동으로 옮긴 새 MBC 보도국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 출근했다. 그렇게 뱉고 싶었던 한 문장 “MBC 뉴스 이용마입니다”가 눈물 섞여 토해졌다. 앙상하게 마른 그를 보고 눈물을 닦던 동료들에게 그는 힘을 짜내 일갈했다. “촛불 시민들을 잊지 마라. 비판과 감시가 언론 본연의 역할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약자를 끊임없이 대변해야 한다. 가진 게 많은 이들은 소수이고 가진 게 적은 사람들이 다수라면, 우리는 당연히 다수를 대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언론학 교과서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말이 그의 입을 통하자 더 선명해졌다.


고인은 투병 중 “자유와 평등이 넘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를 꿈꾼다”고 늘 강조했다. 언론의 존재가치가 의심받는 시대의 기자로 살면서, 그의 말을 곱씹어보게 된다.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사실 단순하지 않은가. 그가 말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데 보탬이 되도록 하루하루 노력하고 초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우리에게 그의 꿈이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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