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둘로 갈리는 건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로 합쳐지는 것보다는 낫다. 신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에서 한몸처럼 팔다리를 휘두르는 군인들, 국가주석의 말에 로봇병정처럼 구호로 응답하는 인민해방군의 모습에 서늘한 느낌을 받은 건 ‘하나가 된 전체’가 얼마나 위압적이고 무서운지 알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얘기 꺼내면 싸움 난다”고 하면서 다들 그 이야기를 한다. 소셜미디어에서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선 글 안 올리려고 했지만”이라는 서두를 달며 글을 올린다. 서초동에 100만, 200만 명이 모였다고 하더니 곧이어 광화문에 300만 명이 모였다고들 한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선택을 강요한다. 이번 사태 덕분에 물 위로 떠오른 계급적 사회적 이슈들은 거리의 힘 대결과 숫자싸움 때문에 다시 물 밑으로 가라앉은 느낌이다.
언론은 조국과 집회로 도배된다. 표창장을 파헤치고 서초동과 광화문의 집회장소 면적을 계산하고 화장실 숫자를 센다. 신문방송은 인생에 하등 도움되지 않는, 내가 살면서 별로 알고 싶었던 적 없는 것들로 채워진다. 기사를 보면서 ‘몰랐던 소식’ ‘알고 싶었던 정보’를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언제였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미디어는 각자 하고 싶은 얘기만 하고, 독자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확증편향의 시대에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민심을 분열시키는 게 목적인 것 같던 언론들이, 민심이 분열됐다고 탄식한다. 탄핵을 이뤄낸 촛불이 둘로 나뉘었다고 하는데 원래 하나의 촛불이 아니었다. 이 생각 저 생각들이 그때 그 이슈에서 거대한 교집합을 만들어냈던 것뿐이다. 목소리는 하나나 둘이 아니라 많을수록 좋다. 세상에는 75억3000만개의 목소리가 있고, 한국엔 5140만개의 목소리가 있다. 얼마 전 경향신문에 실린 글들. “하루하루 버티는 이들 옆에서 깃발을 들겠습니다” “탈시설과 장애인 학습권을 위해 깃발을 들겠습니다” “보수와 진보 모든 남성연대와의 싸움에서 깃발을 들겠습니다” “멸종의 문턱에서 깃발을 들겠습니다” “시민 아닌 시민, 난민을 위해 깃발을 들겠습니다”. ‘광화문과 서초동 사이에서 나의 깃발을 들겠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갑고 고마웠다. 이들이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다. 본래 사람의 목소리는 다 다르다.
지난달 일본 아사히신문에 혐한 보도를 비판하는 사설이 실렸다. 2차 대전 시기 자신들을 비롯한 일본 언론의 보도를 반성하면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미디어에 필요한 것은 ‘거리감’이라고 썼다. 정권이나 집단이나 사람이나 사건과의 거리감을 잃고 언론이 확증편향을 양산할 때에 시민들이 다시 일깨워준다. 어디에 몇백만 명이 모였다 한들 이 사회의 많은 이들은 저마다 깃발을 갖고 있다고. 광화문과 서초동 사이에, 그 밖에, 그 옆에, 혹은 멀리 떨어진 어떤 곳에든 서 있을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