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걸그룹으로 데뷔했을 때 세상이 떠들썩했다. 설렌다는 뜻의 ‘설리설리하다’라는 신조어가 널리 쓰일 정도였다. 한편, 걸그룹에 요구되는 강도 높은 감정노동과 꾸밈 억압에서 벗어난 설리는 다른 의미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어느 쪽이든 설리에게 가혹했을 것이다. 14일 설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이번에도 속도전에 급급하여 보도 권고 기준을 무시한 기사가 쏟아졌다. 하려는 이야기는 다른 주제지만, 해당 사건에서 깊은 우울감이나 손이 떨리는 등의 신체 증상을 느끼는 분은 이 글을 건너뛰길 바란다.
툭하면 논란의 중심이 됐지만, 설리의 발언과 행동은 의견을 다투기보다 다양한 독해가 어울리는 텍스트였다. 그만큼 행간과 의미가 풍부했다. 예를 들어보자. 여성 연예인의 신체를 찍은 사진에 자극적인 제목을 붙이는 것이 재미있는 스포츠처럼 여겨지는 문화에서, 걸그룹 출신 연예인이 여성의 몸을 압박하는 의복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실천한다. 이때 스포트라이트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기사에서 핵심 단어는 특정 반응을 유도하고, 댓글은 선별의 과정을 거쳐 여론이 된다. 기사는 완전한 팩트라기보다 편집숍과도 비슷하다. 무의미하고 악랄한 댓글을 ‘의견’으로 소개하고, 범죄도 아닌 개인의 행동을 ‘논란’으로 소개하는 보도는 무엇을 부추기고 유도하고 삭제했을까? 누군가의 행동을 관심 끌려는 기행으로 깎아내리면, 성희롱과 모욕을 일삼는 이들은 면죄부를 얻는다. 당사자들이 상호 합의한 호칭도 비난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다. 지켜보는 여성들은 ‘이렇게 되기 싫으면 튀지 말라’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설리는 자신을 더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발언하는 방식으로 맞섰다. 많은 여성이 용기를 얻었다. 연일 설리의 ‘당당하고 쿨’한 태도가 헤드라인에 등장했다. 그러나 설리의 태도가 아니라 설리에게 쏟아진 부당한 폭력에 집중해야 했다. 폭력은 피해자인 설리가 움츠러들지 않는다고 해서 무용해지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편견을 없애고 싶었던 맥락을 지우고 특정 이미지만 소비하면 의연한 용기는 폭력을 축소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구실로 둔갑한다. 그래서 다들 막연히, 설리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면전에서 말로 찌르는 프로그램에 나가서도 웃어야 하는 마음이 멀쩡할 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고인을 괴롭힌 악플이 얼마나 심했는지 낱낱이 재조명하지 말자. 이는 또 다른 가해이다)
누군가의 행동이나 발언을 섣불리 논란이라고 보도하기 전,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적절하게 판단하고 필터링해야 한다. 무엇을 강조함으로써 무엇이 가려지는지 섬세하게 고려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논란 아닌 논란 남발을 멈춰야 한다. 이러한 의식 없이 쓰인 기사는 괴롭힘을 주도하는 게시물처럼 위험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특별한 감각, 설리가 없애려던 편견이 공고한 사람들은 모를 느낌을 공유한 사람들이 그 순간과 눈빛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