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 벌새

[글로벌 리포트 | 핀란드] 최원석 핀란드 라플란드 대학교 미디어교육 석사과정

최원석 핀란드 라플란드 대학교 미디어교육 석사과정. “정신적 건강은 우리 모두 신경 써야 할 문제입니다. 누구든 삶의 상황이나 나이와 무관하게 심리적인 문제로부터 영향 받을 수 있습니다. 며칠 전 25살 설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살피면 좋겠습니다.”


지난 19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Kpop 댄스 커버 대회. 주최 측 관계자가 무대에 올라 말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꺼내는 이야기인 듯 잠시 목이 잠겼다. 참가자들도 몇 달간 연습한 춤을 선보이던 열기를 가라 앉히고 슬픔을 나눴다. 고인이 겪은 외로움까지도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어느 참석자가 전한 소감이다.


핀란드인의 상식으로 보면, 현재 케이팝은 사회적으로 전혀 건강한 산업이 아니다. 성적(sexual) 경쟁 속에 미성년자를 내몰고, 인권과 사생활에 무감하며, 불공정 계약과 불평등한 노동 관계를 바탕으로 성과를 내고 수익을 모은다. ‘연습생’ 생활과 같은 형태로 유지되는 장기간 훈련 과정 속에서 예비 연예인들은 자신을 버리고 체제에 순응해야만 살 수 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내내 희생하고도 마땅히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 그러면서도 순간의 실수나 사고도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세계. 핀란드 팬들도 이런 부조리함을 알고 또 공유한다. 이 속에서 탄생한 한국 아이돌이 해외 팬에게 사랑받는 모습을 보며, 나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 아이돌 대부분의 경우, 산업 구조 속의 경쟁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선까지 견뎌야 한다. 특히 여성은, 끊임없이 판타지를 재생산하는 연예 산업 속에서 성적으로 소비되고 동시에 그 안에 묶인다. 이를테면 설리가 활동했던 그룹 f(x)의 또 다른 멤버 엠버(Amber Liu)는 ‘내 가슴을 찾아서’(Where is my chest?)라는 제목의 영상을 직접 촬영해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다. 왜 다른 여성 연예인 같은 몸매를 갖추지 못했느냐는 폭력적인 댓글에 맞받아치는 답변이었다. 누구는 가슴이 없다는 이유로, 또 다른 이는 가슴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논란거리가 되고, ‘여자는 여자가 돕는다’는 문구를 입었다며 손가락질 받는 세상은 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설리는 아주 한국적인 맥락에서 고립된 개인이었다.


현재 핀란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팝 뮤지션 중 하나인 알마(Alma Miettinen)를 보며 한국의 포용성과 폭력성을 새삼스레 돌아보게 된다. 연노란 네온색 머리색이 인상적인 이 뮤지션은 올해 여자친구에게 선사한 곡 ‘Summer’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선택과 취향에 관해 비교적 개방적인 핀란드에서도, 이런 공개 발언은 쉽지 않다고 알마는 인터뷰에서 밝혔다. 알마는 핀란드 대통령이 주최하는 독립기념일 연회에도 평소와 같은 패션으로 참석했다. 그는 문화적 다양성(multicultural)을 지닌 핀란드가 자랑스럽다며 국가적 상징인 사자 문양을 목걸이로 착용했다. 어느 핀란드 언론도 그의 성적 지향을 논란으로 다루지 않으며, 튀는 외모나 여성스럽지 않은 패션을 비난하는 네티즌도 거의 없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좋아할 수 있는 이런 마음을, 한국 사회는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또 다시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누군가가 세상을 등지도록 하지 않으려면.


영화 <벌새>에서 선생님 영지가 중학생 은희에게 건넨 말을 빌려 본다. 아무리 힘들 때에도 손가락 움직일 힘은 남아있다고. 언론은 습관적으로 크고 대단한 일에 주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무엇인가 독차지할 만큼 힘 있는 사람들의 반대편 세계, 손가락조차 겨우 움직이는 사람들의 작은 아픔과 몸짓에 좀 더 눈길 주었으면 한다. 벌새처럼 매일 수천 번 날갯짓하던 누군가를 보살피지 못한 우리가, 지금이라도 보일 수 있는 한 조각 예의가 아닐까. 부디 한국이 아닌 그곳에서는 원하는 모습 그대로 빛나길. 당신은 참 예쁘고 용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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