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란 누군가를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뽑지 않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학자 프랭클린 P. 애덤스가 관찰한 선거의 본질이다. 실제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노력 못지않게 싫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임명동의 투표 역시 최악을 피하기 위한 견제 장치로 채택됐다.
지난 10년 YTN의 공정보도 투쟁을 이끌었던 노종면 YTN 앵커가 보도국장 임명동의제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달 21일부터 이틀 동안 보도국 구성원 374명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해 8월 현덕수 보도국장 임명동의 투표에서는 77.75%가 찬성했다. 당시 찬성표를 던진 구성원 중 약 30%는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노 앵커가 복직 후 맡았던 ‘더뉴스’의 부진, 이미 폐지됐던 수습기자 ‘하리꼬미’를 폐지하겠다는 등 취재현장에 대한 이해 부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건 소통 부족이다. YTN의 한 기자는 “해직자 출신 간부들의 발언권은 커졌지만 다른 기자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기자는 “파업 승리 후에도 이전과 다를 게 없다는 실망감이 젊은 기자들 사이에서 생겼다”고 말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관련한 YTN의 보도가 편파적이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비슷한 갈등을 겪은 한겨레신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586세대 선배들과 젊은 후배들 사이 인식의 괴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을 때, 파업 이후에도 바뀐 것이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을 때, 공정방송을 위해 투쟁한 선배들이 또 다른 편파보도를 한다는 의심이 파고들었을 때, YTN에서는 어떤 소통의 노력이 있었을까? 이번 임명동의안 부결은 적어도 위로부터의 노력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소통의 파산이다.
SBS도 같은 처지다. 지난달 25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보도본부장 임명동의 투표에서 정승민 후보자가 낙마했다. 구체적인 찬반 비율은 노사합의에 따라 공개되지 않았지만 재적인원의 50% 이상이 반대했다. 투표 참여 인원의 과반이 아닌 재적 인원의 과반이 반대해야 부결 조건을 충족한다는 점에서 정 후보자는 YTN보다 상대적으로 더 낮은 허들을 넘지 못한 셈이다. 정 후보자는 지난 2017년 5월 보도국장 재직 당시 ‘세월호 인양 지연 의혹’ 오보로 경질된 적이 있다. SBS가 사내외 인사로 꾸린 진상조사위는 “취재와 기사 작성, 게이트키핑 과정에 심각한 부실이 있었다”고 밝혔다. 정 후보자는 오보에 대한 책임으로 6개월 감봉 징계까지 받았다.
SBS의 한 기자는 부결 원인을 두고 “워낙 안 좋았던 일로 징계를 받은” 전력을 거론했다. 언론사가 특정 보도를 두고 내·외부 인사로 진상조사위를 꾸리는 일은 드물다. 그럼에도 SBS 경영진은 이 같은 일에 연루된 인물을 보도 책임자로 내세웠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한 처사다.
국장 임명동의제 도입이 검토되던 때,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편집권 독립이나 지배구조 개선 등 근본적 조치가 뒤따르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말 그대로 임명동의제는 ‘최소한의 견제 장치’일 뿐이다.
잇따른 부결은 임명동의제가 본연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뒷맛이 개운치 않다. 최소한의 견제를 넘어설 최소한의 소통도 없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소통 없는 소통 창구. 지금 대한민국 언론의 민낯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