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주목받는 '좌파 아이콘' 룰라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2019년을 채 2개월도 남기지 않은 지난달 8일(현지시각), 브라질에서 ‘좌파 아이콘’으로 일컬어지는 룰라 전 대통령이 연방경찰 수감시설을 빠져 나왔다. 부패 혐의로 1심과 2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 받고 지난해 4월7일 수감된 지 580일 만이었다. 룰라 석방은 연방대법원이 지난 2016년 2월 최종심이 아닌 2심 결과만으로도 구속할 수 있다고 한 판결을 스스로 뒤집은 데 따른 것이다.


열광하는 지지자들을 향해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소감을 밝힌 룰라는 단숨에 정국의 핵으로 떠올랐다. 부패 혐의를 완전히 벗거나 재판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룰라 석방 자체가 정치권에 잇달아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그가 속한 좌파 노동자당(PT)은 크게 고무됐다. 2016년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 탄핵과 같은 해 10월 지방선거 참패, 2018년 10월 대선 패배 등을 거치며 잔뜩 위축됐던 노동자당은 룰라 석방으로 부활의 발판이 마련됐다고 판단하는 분위기다. 노동자당은 브라질 정당 가운데 가장 많은 230만 당원과 하원 원내 1당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앞세워 2020년 지방선거와 2022년 대선을 통해 정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다.


룰라는 석방되자마자 전국 주요 도시를 찾아가는 ‘정치 캐러밴’으로 지지층 결집에 나섰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내년 지방선거에서 좌파진영의 선거 캠페인을 진두지휘할 것으로 보인다. 지방선거에서 좌파진영이 승리하거나 선전하면 룰라가 피선거권을 회복해 2022년 대선에 직접 출마하거나 특정 후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선거에 깊숙이 개입할 것으로 관측된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에도 제동이 걸렸다. 올해 국정 최대 현안으로 꼽히던 연금 부문 개혁에 어느 정도 성공한 보우소나루 정부는 추가 개혁을 서두르다 갑자기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룰라가 현 정부의 친기업-시장개방 정책에 강한 제동을 걸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기 때문이다. 룰라의 정치적 비중이 그만큼 크고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다.


룰라 전 대통령이 남미 좌파 연대 구축의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인지도 관심이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부정선거 시비로 물러나 아르헨티나에 망명한 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 재임 시절 세계에서 가장 검소한 대통령으로 잘 알려진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상원의원 등과 어느 정도 호흡을 맞출 것인지가 관건이다.


정치 전문가들은 극우 성향의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좌파 룰라 전 대통령이 대척점을 이루면서 정치권이 좌-우로 갈라져 갈등의 골이 깊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른바 ‘정치 양극화’는 2019년을 마무리하는 브라질 정치권에서 최대의 화두가 됐다. 국정 수행에 대한 낮은 지지율 속에 ‘집권당 탈당-신당 창당’ 카드까지 쓰며 승부수를 던진 보우소나루와 정권 탈환 의지를 거듭 확인하고 있는 룰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내년에 대규모 군중이 동원되는 시위가 빈발할 것이라는 관측도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룰라 석방으로 브라질에서 6년째 계속되는 권력형 부패 수사는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사법 당국은 2014년 3월부터 ‘라바 자투(Lava Jato: 세차용 고압 분사기) 작전’으로 불리는 부패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국영에너지회사 페트로브라스가 장비와 건설 관련 계약 수주의 대가로 대형 건설업체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정황이 포착되면서 시작된 수사를 통해 브라질과 중남미 9개국의 정·재계 유력 인사와 관료들이 줄줄이 처벌을 받고 있다. 최근에 이뤄진 여론조사에서 부패 수사가 아직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사가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답변이 81%에 달했다. 부패 수사의 목적이 달성됐으나 이제 끝내야 한다는 답변은 15%에 그쳤다. 부패척결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내용이다. 룰라 석방 이후에도 정치권과 법조계에서 그를 재수감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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