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그럼 기자들을 대표해서 박 기자님이 사과하시죠.”
‘20대 남성의 반 페미니즘’을 주제로 강의하는 자리였다. 나는 질의응답 시간에 언론이 반 페미니스트 집단을 과대대표하며 오히려 ‘젠더 갈등’을 부추긴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내 말을 듣고 있던 한 중년 남성이 내게 농담조로 던진 말이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 숙여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최근 남성의 페미니즘 수용에 관한 책인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을 내고 페미니즘 관련 강의나 행사에 몇 차례 초청받은 적이 있다. 그때마다 예외 없이 “언론은 대체 어떻게 해야 변할 수 있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나는 언제나 이렇다 할 혜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로, 멋쩍게 “참 어려운 문제네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주변의 젊은 기자들은 이미 변화하고 있다. 성평등 의식이 확산되는 흐름에 발맞춰, 양질의 ‘젠더’ 기사가 꾸준히 나오는 추세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주최하는 양성평등미디어상 수상 목록을 보면 잘 드러난다. 미투·불법촬영·단톡방 성희롱·여성 비정규직 노동·남성중심적 사법체계 등 주제도 다양할뿐더러, 탐사·르포·장기 프로젝트 등 심층 보도가 수상작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언론이 더욱더 나빠지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 커뮤니티 반응을 그대로 옮겨 적거나, ‘실시간 검색어’를 제목에 넣고 ‘짜깁기’ 혹은 ‘베껴쓰기’로 만드는 기사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지면에서 여성혐오 문제를 깊이 있게 파고든 언론사는, 정작 온라인 판에서는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기사를 쏟아낸다. 포털 중심으로 기사가 소비되는 구조이다 보니, 오로지 조회 수를 위해 쓴 10개의 기사가 1개의 값진 기사를 덮고 있는 형국이다.
다들 문제가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폭주’는 멈춰지기는커녕 “언론사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로 정당화된다. 많이 읽히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성폭력 사건은 선정적으로 다루고, 페미니즘 의제에선 극단적인 의견을 여론인양 치켜세우며, 여성 연예인은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게 자연스러워진다. 저널리즘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어디 있겠는가.
2015년 이후 유례없는 ‘페미니즘의 시대’에 언론은 졸지에 양날의 검이 됐다. 성폭력·성차별 문제를 건드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여전하지만, 2차피해를 입히거나 ‘백래시’를 추동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후자는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지금, 젠더관점에서의 언론개혁을 지체할 수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기자들 개개인이 더는 방관하면 안 된다. 부서나 출입처를 기준으로 ‘우리는 아닌데’라고 할 게 아니라, 자신의 회사에서 어떤 기사가 나가는지 젠더 관점으로 평가하고 지적하는 것이 시작이다. 기자들이 먼저 움직여야 언론사와 포털을 움찔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관행’을 건들 수 있게 된다. 2020년에도 ‘죄송한 기자’로 살 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