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공영방송 NHK '장악'되나

[글로벌 리포트 | 일본] 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저는 상당히 낡은 인간입니다. 솔직히 (집에선) 컴퓨터나 인터넷도 안 써요.”


모 종편에 나오는 ‘자연인’의 말이 아니다. 일본의 공영방송 차기 수장의 고백이다. 일본 3대 거대은행을 이끌던 인물이기도 하다. 마에다 데루노부(74) 전 미즈호 파이낸셜그룹 회장. 그는 오는 25일에 3년 임기 NHK 회장에 취임한다.


NHK는 4월부터 TV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도 동시 전송한다. 수신료 징수 범위를 PC나 스마트폰으로 넓히기 위해서다. NHK의 비원(悲願)이자, 현 회장이 일군 최대 치적이다. 그런데 마에다는 회장 내정 회견에서 외려 “상시·동시 전송이 뭐냐”고 되물었다. “갑작스런 (회장) 지명에 나 자신도 놀랐다”고도 했다. 놀란 쪽은 오히려 기자들이었다.


회장 교체는 전격적이었다. 우에다 료이치(70) 현 NHK 회장은 경영 수완이 좋았다. 공영방송 실무에도 정통해 “후임으로 그만한 인물 찾기 힘들다”는 평가가 상당했다. 연임은 ‘따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그러다 생각지 못한 역풍을 맞았다. 지난해 9월, NHK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 거대 우편·금융그룹인 ‘일본우정(日本郵政)’의 부적절한 보험 판매 의혹을 폭로했다. 비리는 사실로 확인됐고, 일본우정 사장단 3명은 방송 3개월 만에 동반 사퇴했다.


하지만 ‘특종’의 상처는 깊었다. 방송 이후 스즈키 야스오(69) 일본우정 부사장은 NHK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경영위원회’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는 총무성 최고위 관료인 사무차관을 지냈고, 이를 발판삼아 일본우정 임원 자리를 꿰찬 인물이다. 결국 경영위원회는 우에다 회장을 ‘엄중 주의’ 처분했고, 회장은 일본우정 측에 사죄했다. 그 과정에서 후속 보도까지 지연되면서 “NHK가 외압에 굴복했다”는 비판이 들끓었다.


일본 언론은 ‘우에다 퇴출’의 좀 더 내밀한 배경을 전했다. “총리관저는 ‘우에다 회장이 야당에 너무 신경을 쓰고, 정권 비판 프로그램에 대한 장악력이 약하다’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마이니치신문)는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우에다를 두고 ‘도탄바(土壇場)’란 표현까지 썼다. 에도(江戶) 시대 죄수를 참수하기 위해 흙(土)을 쌓아 올린 단(壇) 형태의 ‘사형 집행장’을 뜻한다. 임기 막판, 정권에 불편한 기사로 순식간에 포박당한 뒤 단두의 칼날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였다고 풀이했다.


NHK 경영위원회는 대신 방송 실무, 저널리즘 철학의 ‘문외한’인 마에다를 만장일치 회장으로 밀었다. ‘퇴출’과 ‘이식’의 구조는 비슷하다. 총리관저는 NHK 경영위원회 인선에 영향력이 상당하다. 마에다는 ‘총리관저 인맥’으로 분류된다. 아베 총리와 가까운 재계 단체인 ‘사계의 모임’에 자주 얼굴을 비친 걸로 전해진다. 현 회장 퇴출을 이끈 일본우정 부사장은 정권 실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과 가깝다. 곳곳에 총리관저의 입김이 서려 있다.


NHK 구성원들은 착잡하다. ‘관저가 주도한 인선’, ‘관저가 조종하기 쉬운 사람’이란 평을 받는 인물이 재등장한 탓이다. 바로 모미이 가쓰토 전 회장의 ‘데자뷔(기시감)’다. 그는 아베 총리가 2012년 말 취임 후 NHK 경영위원회에 측근을 대거 투입한 뒤 회장으로 앉힌 극우 성향 사업가였다. 2014년 1월 취임 회견 때 “정부가 오른쪽이라고 하는 걸 (NHK가) 왼쪽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공영방송 수장이 총리 국가관에 복무한 기간, NHK는 ‘아베 채널’이란 비아냥을 들었다. 권력 독립성이 후퇴했고, 제작 자율성도 훼손됐다.


마에다 신임 회장은 “아베 총리의 사모임 일원 아니냐”는 질문에 “권력을 가진 정권이 언론 감시를 받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그에겐 민주당 정권이던 2008년, NHK 경영위원으로 추대됐다가 국회에서 부결된 쓰라린 기억이 있다. 11년이 지나 ‘회장 취임’ 형태로 복수를 이룬 셈이다. 자민당 정권에서 NHK에 무혈입성한 새 선장은 ‘NHK호(號)’를 어디로 이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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