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초 북한이 ‘성탄선물’을 보내겠다고 한 뒤로 우리 국민은 매일 조심스럽게 택배함을 열어보는 심정으로 싱숭생숭한 연말을 보냈다. 선물은 없었고 2020년 새해는 그럭저럭 평온했다. 아무도 원치 않는 선물은 안 보내는 게 진짜 선물이다.
나흘 간 열린 북한 조선노동당 전원회의 결정문에 23번 등장한 ‘정면돌파’를 놓고 해석이 분분했는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새해 첫 공개행보로 비료공장을 방문함으로써 정면돌파가 자력부흥의 다른 표현이라는 분석에 무게를 실어줬다. 풀어쓰자면 ‘미국과의 대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사회주의 경제강국 건설이라는 오래된 목표를 향해 장기전의 태세로 난관을 극복하겠다’는 뜻이다.
전원회의 결정문에 남북관계 언급은 없었지만, 이후 서울을 겨냥한 북한 고위인사의 발언과 대외선전매체의 논조에는 냉기가 서려 있다. 지난 11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고문은 남한 정부를 향해 “중뿔나게 (북미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며 대놓고 ‘면박’을 줬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지난 7일 신년사에서 현시점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인고의 시간”이라고 규정했다. 당분간 대화의 물꼬를 트기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문 대통령은 또한 “남과 북 모두 북미대화를 앞세웠던 것이 사실”이고, 이는 “북미대화가 성공하면 남북협력의 문이 더 빠르게 더 활짝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이런 판단에 따라 정부는 그동안 민간 교류를 제쳐둔 채 당국 간 대화에 집중하고 북미 중재에 올인했다. 그러나 하노이 담판이 결렬된 이후 당국 간 대화의 문은 닫혔다. 오판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포트폴리오가 없었다. 소통에는 대문뿐만 아니라 쪽문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올해 한반도 정세 개선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선택지는 별로 없다. 가능한 해법은 현재의 잠정적 평화 기조를 지키면서 면박을 당하더라도 북미대화를 응원하는 역할을 계속하는 것이고, 남북의 경제와 문화, 학술, 체육, 언론, NGO 등 민간 부문과 지자체 간 교류에 힘을 쏟는 것이다. 특히 남북 언론 교류는 상호 이해를 넓히고 갈등 소지를 줄이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당국 간 대화 우선’이라는 기조부터 바꿔야 한다. 써오던 약이 듣지 않으면 처방을 달리해야 한다. 민간 대화와 교류의 우선순위를 높이고 상호신뢰를 뿌리부터 다져나가야 한다. 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스포츠 교류, 철도·도로 연결, 관광 재개, 비무장지대의 세계유산 공동등재 등을 언급한 것도 이런 현실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한다. 부디 문재인 정부가 남북 민간 교류의 ‘촉진자’가 되길 기대한다.
중요한 것은 신뢰 회복을 위한 정부의 결단이다. 감수할 것은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북측에 보여줘야 한다.
남북 경협과 교류 확대를 위해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에 제출한 대북제재 완화 결의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미국을 설득해 운신의 폭을 넓히는 것도 의지 표현의 한 방법이다.
또한 미국과 이란의 충돌 상황을 고려해 올해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유예를 끌어내는 과감한 접근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김 위원장이 ‘충격적 실제행동’을 실행할 명분은 현저히 약화할 것이다.
유연해져야 한다. 한미동맹의 틀은 딱딱하게 해석하고 제재대상은 광범위하게 적용하면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모범생의 자세로는 남북 대화와 교류의 폭을 넓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