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편법 논란을 떠나 ‘타다’ 서비스는 시장의 호응을 얻었다. 승차거부와 난폭운전에 지친 승객들은 요금을 더 내더라도 타다를 불렀다. 타다가 일반 택시에 비해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은 인센티브(급여) 체계다.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승객을 태워야 사납금을 채운 뒤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택시 기사들과 달리, 시간제 급여를 받는 타다 기사들은 승차를 거부할 이유도, 난폭운전을 할 이유도 없다.
미디어 업계에도 ‘난폭운전’이 존재한다. 실시간 검색어(‘실검’)로 기사를 쏟아내는 ‘어뷰징’이다. 포털 업계 관계자들은 안타까워한다. ‘실검 순위’의 순기능마저 죽고 있기 때문이다. 실시간 검색어는 지진, 태풍, 화재 등의 재난 전파 속도가 매우 빠르다. 중요한 사회 이슈 공론화 기능도 갖고 있다. 그러나 ‘트래픽’이라는 먹잇감을 쫓는 하이에나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정치적 목적의 디지털 시위, 홍보를 위해 실검 순위를 끌어 올리는 마케팅업체, 연예인을 띄우려는 팬들까지. 물론 원조는 언론사들이다. 포털들은 점점 ‘실검 순위’의 노출 비중을 줄여가고 있다. ‘공유지의 비극’이다.
언제부터 언론사들이 시간에 쫓겨 질주하는 총알택시가 됐을까.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신문은 거리에서 팔렸다. ‘뉴스보이’들이 헤드라인을 읽으며 돌아다녔고, 가판에 진열돼 팔렸다. 여러 신문들이 나란히 팔리다 보니 더 자극적인 기사와 제목으로 눈길을 끌어야 했다. ‘옐로 저널리즘’의 전성기였다. 그러다 교통이 발달하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신문은 ‘배달’ 중심으로 바뀌었다. 정기구독자 중심의 신문이 되면서 신문은 비로소 시간을 벌었고, 품격이라는 것을 갖출 수 있었다. 낭만적 사명감도 있었다. “우리가 쓰지 않으면 우리 독자들에게는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위기가 찾아온 것은 통신의 발달, 즉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이었다. 사람들은 ‘포털’에서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검증되지 않은 속보와 자극적인 제목이 범람했다. 기자들은 난폭운전을 하는 강태공 신세가 됐다. ‘가판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0세기 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종이 값이 안 드니 너도나도 뛰어들어 무한정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기자도 독자도 지쳐 ‘이건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들 무렵 새로운 변화가 도래하고 있다. 이른바 ‘구독 경제’가 각광을 받고 있다. 잠깐, 구독 경제의 원조는 우유와 신문이 아니던가. 최근 영미권 언론들은 ‘배달 전쟁’을 벌이고 있다. 물론 종이신문 배달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디지털 구독자 470만명을 모았고, 종이잡지 85만 부를 배달하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디지털판 구독자는 80만명이다. 이메일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의 ‘악시오스’, ‘모닝브류’ 같은 매체들도 구독자가 100만을 훌쩍 넘어선지 오래다.
다시 ‘시간’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입에 닳도록 강조하는 ‘좋은 콘텐츠’는 시급으로 운행하는 타다 기사들처럼 기자들에게 충분히 취재하고 궁리할 시간이 주어졌을 때만 가능하다. 승객들이 더 비싼 타다 요금을 기꺼이 지불하는 것처럼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공들여 만든 콘텐츠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전제 조건은 ‘시간’이다. 가판의 시대가 저물고 배달의 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 기자들에게 시간을 보장하라.